[류혜숙의 여행스케치] 포항 구룡포읍 석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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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19   |  발행일 2019-04-19 제36면   |  수정 2019-04-19
바위가 널린 한반도 동쪽끝…당집 앞엔 제신들처럼 허리숙인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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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병리 당집. 당집 앞에 허리를 숙인 바위들이 제신들처럼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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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장 너머 갯바위에 ‘한반도 동쪽 땅끝’ 조형물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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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바위. 고대인들의 구멍 그림이 남아 있는 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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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일포 원경. 작은 모래사장에서부터 마을은 시작된다.

석병(石屛)이란 돌병풍, 마을 앞 바닷가에 병풍 같은 바위가 있다고 했다. 또 그러한 병풍바위가 끝이 뾰족하게 솟아 아흔 아홉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고도 했다. 마을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바다를 주시하며 달렸다. 병풍 같은 바위도 아흔 아홉 개의 뾰족한 골짜기도 찾아낼 수 없었다. ‘옛 사람들의 과장법’을 문득 떠올렸을 때, 마을과 마을 사이의 갯바위 지대를 발견했다. 오랜 세월 동안 모서리가 부드러워진 바위들이 널려 있는 그곳은 한반도의 동쪽 끝이었다.

높직한 돌담장 가진 집 대문은 없어
양식장 너머 갯바위 위 ‘땅끝 돌탑’
해안길 오르면 나루터 넓은 본마을
고대인 바위 구멍 그림 ‘성혈바위’
바다사람들 풍요·다산·안전 기원

◆석병 1리 두일포

물이 말라버린 작은 하천이 바다로 향하는 작은 모래사장에서부터 마을은 시작된다. 해안의 남쪽 끝에 ‘두일포’라 새겨진 바위가 있다. 두일포는 석병 1리의 오래된 이름으로 우암 송시열이 명명했다고 한다. 우암은 조선 숙종 때 장기현(현 포항시)에 유배되었다. 1675년 6월 그의 나이 69세부터 73세가 되는 1679년까지 3년10개월을 장기에서 지냈는데, 그때 그는 이곳 마을을 자주 찾았다 한다. 그가 보기에 이 마을 뒷산의 모양이 마치 말(斗)을 엎어 놓은 것 같고, 마을 앞의 나루터가 일(日)자형을 이루고 있어 두일포(斗日浦)라 부르게 했다 한다. 말은 곡물의 양을 측정하는 그릇으로 보통 정방형이다. 말을 엎어 놓으면 들처럼 평평한 사각이다. 그래선지 흔히 ‘들포’라고도 부른다.

해안선을 따라 집들이 들어서 있고 바다에 면한 집들은 높직한 돌담장을 가졌다. 색깔도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돌들이 시멘트와 일체가 되어있다. 마치 도화지 위에 색종이를 오려 붙인 듯하다. 담장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두꺼워지는 사다리꼴 모양으로 매우 견고해 보인다. 그처럼 굳건한 담장에 대문 없는 집이 수두룩하다. 바다를 향해 가슴을 열어 제친 집들이다. 내항이 텅 비어 있다. 배들도 사람들도 모두 바다에 있을까. 동네의 집들이 드물어질 즈음 작은 언덕 아래에 당집이 있다. 석병리 사람들은 마을을 수호하는 골매기 할버지와 할머니에게 4월과 10월에 동제를 지낸다고 한다. 당집 앞에 허리를 숙인 바위들이 제신처럼 서 있다. 아, 그대들이 병풍바위인가요.

◆한반도 동쪽 땅 끝

당집 즈음에서 마을의 해안길이 끝난다. 길 너머는 검은 갯바위 지대다. 동네를 빠져 나와 한적한 도로를 잠시 달리다 ‘한반도 동쪽 땅끝마을’이란 표지판을 따라 바다 쪽으로 꺾어 들어간다. 직선의 좁은 길이 완전한 평지로 보이는 밭 사이를 뚫고 바다에 닿아 있다. ‘들포’의 모습 그대로다. 밭의 한 구획은 놀랍게도 축사다. 황토빛깔의 건장한 소들이 수평선처럼 조용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허용된 땅 위에 우두커니 서 있거나 제 아랫배로 땅의 온기를 받아들이고 있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이방인을 향해 순하고 호기심 어린 시선을 끔뻑였다.

길은 갑자기 미끄러져 내리고 갯바위 무성한 해안선을 드러낸다. 바다로 뻗어나간 갯바위와 반도의 땅 사이에 콘크리트로 밭전(田)자를 그린 양식장이 자리한다. 먼 갯바위 위에 지구본 모양의 동그란 돌탑이 동그마니 서 있다. 저곳이 땅 끝이다. 돌탑에는 ‘한반도 동쪽 땅 끝, 동경 129° 35’ 10”, 북위 36° 02’ 51", 포항시 구룡포읍 석병리’라고 새겨져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세운 것이니 땅 끝이 분명하다. 땅 끝으로 가려면 양식장의 외벽 위를 걸어야 한다. 양식장은 분주하다. “못가요. 지금 약을 해 놔서 위험해요.” 수 년 전 저 표지석을 만져본 적이 있다. 그날 바다는 잔잔했고 양식장은 텅 비어 있었다. 거친 파도가 바위를 후려갈기고 양식장의 벽을 넘어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어차피 오늘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편이 좋은 날이라 생각한다.

북쪽으로 조금 오르자 갯바위가 조금 더 넓게 보인다. 돌탑은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지만 위리안치마냥 쓸쓸하다. 그 주변으로 오랜 세월 동안 모서리가 부드러워진 바위들이 널려 있다. 아흔 아홉 개보다 훨씬 많은 골짜기들의 바다다. 어디선가 음악소리 들린다. 등 뒤에는 솔숲이 펼쳐져 있고 몇 채의 텐트가 불시착한 낙하산처럼 걸려 있다. 수년 전 이 일대는 군부대였다고 한다. 어느 날 부대는 떠났고, 그 자리에는 오토캠핑장이 들어섰다. 돌을 쌓아 올린 작은 초소 하나가 바닷가 갯바위에 우두커니 남아 있다.

◆본 마을, 석병

캠핑장을 지나 해안길을 조금 더 오르면 석병 2리, 본 마을이다. 나루터가 넓다고 하여 ‘범진’ 혹은 ‘범늘’이라고도 한다. 두일포의 돌담이 이곳에서도 드문드문 보인다. 해안선은 완만하고 좁은 해안에는 자갈이 많다. 바다를 향해 방파제가 길게 뻗어 나가는 내항의 가장자리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툭 떨어져 있다. 공들인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고 ‘성혈(性穴)바위’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성혈은 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바위 구멍 그림이다. 형태적 차이는 있지만 민속에서는 알구멍, 알바위, 알터, 알미, 알뫼 등으로도 부른다. 청동기 시대 이후의 유적으로 주로 고인돌의 덮개돌이나 자연 암반에 새겨진다.

고대인들은 바위에 홈을 내고, 홈에 작은 돌을 굴려 구멍을 만들었다고 한다. 작은 홈이 탱자 혹은 달걀 크기가 될 때까지 오래 오래 작은 돌을 굴리며 풍요와 다산과 안전과 장수를 빌었을 것이다. 무수한 구멍이 있다. 바위 자체의 상처인지 성혈인지 확실한 구분조차 못하면서도, 손닿지 않는 저 구멍들이 공동체적 인류의 서명으로 느껴진다. 고대인들의 바위 앞에서 어부와 어부의 아내들이 일을 하고 있다. 석병에서 만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무수한 물고기들을 분류하는 분주한 손들 위로 풍요와 다산과 안전과 장수를 빌던 옛 사람들의 손이 겹쳐졌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20번 대구포항고속도로 포항IC로 나가 구룡포 방향 31번 국도로 간다. 구룡포항을 통과해 929번 지방도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두일포, 한반도 동쪽 땅끝, 석병 2리가 차례로 나타난다. 동쪽 땅끝으로 가는 길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이며, 땅끝마을 양식장 입구에도 주차할 공간이 거의 없다. 오토캠핑장 근처에서 조망하는 것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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