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시선] 진실에 이르는 방식, 갈릴레이와 브레히트

  • 뉴미디어부
  • |
  • 입력 2019-04-18   |  발행일 2019-04-18 제30면   |  수정 2019-04-18
지식인·예술인은 義 세워야
브레히트가 쓴 희곡 작품속
갈릴레이는 고문이 두려워
진실 외면한 인간으로 묘사
하지만 참회하고 과업 이뤄
[목요시선] 진실에 이르는 방식, 갈릴레이와 브레히트
김미정 극단 구리거울 대표 연출평론가

어느 시대건, 어느 지역이건 인간이 사는 세상은 늘 그러하지만, 요즈음 벌어지는 사건들을 보면 ‘혼돈’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시시비비와 책임소재를 가려야 할 재판정에서조차 허위진술로 진실은 탈색되고 판결은 길을 잃은 듯하다. 더욱이 불법동영상 유출, 마약파티, 묻지마 범죄로 소란스러운 신문을 읽다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절로 떠오른다. 그리고 진리와 진실과 고결한 정신이 실종된 세상을 구할 의인(義人)을 찾으려고 했던 아브라함의 간절한 심정이 헤아려진다.

의로운 사람은 불의에 대항해 의를 밝혀 세운다.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던 녹두장군 전봉준, 3·1만세운동으로 독립을 되찾고자 했던 유관순열사, 문화로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었던 김구 선생, 그리고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이한열 열사는 의인들이다. 의인은 부당한 힘에 굴복하지 않고, 차별의 경계와 소외의 벽을 허물고, 관습으로 포장된 억압을 뒤집어 보고, 권력과 결합된 절대의 허상을 파헤쳐 세상을 바로잡고 사람을 이롭게 한다. 그리고 지식인과 예술가는 태생적으로 의를 세워야 할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다. 히틀러를 비판한 대가로 ‘구두보다 더 자주 나라를 바꾸며’ 떠돌았던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가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를 집필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브레히트는 ‘갈릴레이의 생애’를 두 번씩이나 고쳐 썼다. 인간과 갈릴레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시각을 달리한 탓이다. 1937년 과학자 또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논하기 위해 이 작품을 집필했던 브레히트는 1943년 재개정본에서 갈릴레이를 식탐 많고 가난을 두려워하며 출세를 위해 아부하는 인간으로 그려냈다. 진실과 과학에 대한 갈릴레이의 배신행위에 대해서는 훨씬 더 인간적인 해석을 했다. ‘철학적으로 우매하고 신학적으로 이단적인 지동설을 철회하라’는 교황청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학설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갈릴레이가 결국 자신의 학설을 철회한 것은 바로 고문 기구에 겁을 먹은 탓이라고 말이다. 결국 브레히트가 표적으로 삼은 것은 갈릴레이가 아니라 현대의 지식인들이다. 그리고 진실을 알고도 그 실천에의 부담에 머뭇거리는 우리에게 돌아가는 방법은 찾아봤는지 묻는다.

1633년 6월22일 종교재판 이후 갈릴레이는 피렌체 근교에서 연금상태로 여생을 보냈다. 죽을 때까지 침묵을 지켜야 했지만, 그는 은밀하게 연구와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1637년 ‘디스코르시’가 조수 안드레아를 통해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갔고, 73세인 1636년 완성한 ‘두 개의 신(新)과학에 관한 수학적 논증과 증명’은 2년 뒤 네덜란드에서 출간됐다.

적군의 동태를 살피거나 이웃집 안방을 훔쳐보는 데나 쓰이던 망원경을 하늘로 돌려 신의 세계를 침범하고 진리의 지위여부를 밝혀낸 갈릴레이. 그의 학문적 실천은 당시의 위계질서와 기독교적 세계관을 통째로 뒤흔드는 불온하고도 불경스러운 도전이었다. 그렇게 용기를 자랑하던 갈릴레이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교황청의 압력에 무릎을 꿇고는 “장애물이 있다면 두 점 간의 최단거리는 곡선일 수 있다”고 변명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학문의 배반자’로 칭하며 평생을 참회하며 산다.

브레히트는 갈릴레이를 과학자이기에 앞서 고문이 두려워 진실을 외면한 나약한 인간이었지만 비겁하게 구한 목숨으로 과업을 완성한 지식인으로 그린다. 브레히트는 갈릴레이로 하여금 안드레아에게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도록 한다. “학문의 유일한 목표는 인간 현존의 노고를 덜어 주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네. 만약 과학자들이 이기적 권력자 앞에서 위축되어 오로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쌓는 데 만족한다면, 그런 과학자들은 학문을 절름발이로 만들 수도 있네.” 갈릴레이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진실을 배반했던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갈릴레이는 지식인으로서 진실에 이르고 진실을 알린 방법은 우회와 참회의 실천이었고, 브레히트는 이를 무대에 올림으로써 예술가의 책무를 다한 것이다. 김미정 극단 구리거울 대표 연출평론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