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국건정치칼럼] 트럼프-김정은 사이에 끼여버린 文대통령

  • 송국건
  • |
  • 입력 2019-04-15   |  발행일 2019-04-15 제30면   |  수정 2019-04-15
北 “오지랖넓게 중재말라”
美 “설득하라고 했는데…”
공받고 드리블 난조 빠진 文
이제 중재자 환상 내려놓고
당사자로서 양쪽 설득할 때
20190415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2일 시정연설에서 최근의 한반도 상황과 관련,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훈계조로 말했다. 문맥으로만 보면 주어는 ‘남측’이지만 실제론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한 말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졸지에 ‘오지랖 넓은’ 사람이 돼 버렸다. 오지랖이 넓다는 말은 ‘무슨 일이고 참견하고 간섭하는 사람’을 비꼴 때 쓰는 말이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도 얼마 전 평양 외신기자회견에서 “남조선은 워싱턴의 동맹이다. 그러니 중재자가 아니고 플레이어”라고 했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북미 비핵화 협상이 재개된 이후 ‘한반도 운전자론’ ‘중재자론’ ‘촉진자론’으로 용어를 바꿔가며 우리 역할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이 스스로 설정한 위치에 불만을 갖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최선희는 한국이 지금처럼 미국의 동맹역할을 계속할지, 아니면 북한 편을 들지 둘 중 하나만 고르라고 압박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한 발 더 나아가 왜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느냐, 왜 자꾸 미국 편만 드느냐고 윽박질렀다. 같은 민족이니 우리 편을 들어야 할 거 아니냐는 요구가 ‘민족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론’ 안에 들어 있다. 문 대통령이 미국 편을 든다는 불만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과 빈손으로 끝난 이번 워싱턴 한미정상회담 이후 더 심하게 표출되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도 문 대통령에게 불만이다. 겉으론 한미동맹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론 김정은 위원장 쪽으로 기울어 중재를 하려고 든다는 생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회담 결렬 직후 백악관으로 돌아가는 전용기 안에서 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정은 위원장을 설득해서 완전한 비핵화와 그에 상응하는 대북제재 해제 카드를 받아들이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중재 요청을 받았다고 공개했다. 당사자로서의 ‘설득’과 제3자로서의 ‘중재’는 다르다. 당시 백악관은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이번 워싱턴 방문에서도 문 대통령은 중재자 역할을 해 보겠다며 ‘굿 이너프 딜’(충분히 좋은 합의)을 절충안으로 들고 갔다. 미국의 ‘빅 딜’(비핵화와 제재해제 일괄타결), 북한의 ‘스몰 딜’(단계적 타결) 입장 충돌에서 중간지대쯤 된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단독정상회담장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기자들과 돌발 간담회를 하는 바람에 ‘2분 정상회담’이 돼 버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을 곁에 앉혀 놓고 올해 마스터스 골프대회 우승자 예상을 묻는 미국 기자의 질문에 “필 미켈슨과 타이거 우즈, 더스틴 존슨이 우승후보”라고 ‘진지하게’ 답했다. 김대중·노무현정부를 이어 대북 햇볕정책을 추진했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조차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노딜’에 이어 워싱턴 한미정상회담도 ‘노딜’이었다”고 혹평하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한반도 문제의 공은 한국으로 넘어왔다. 하노이에서 북미 양측의 카드가 거의 드러난 만큼 워싱턴과 평양을 오가며 설득해서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혀야 하는 역할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드리블 난조에 빠지면서 패스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북한과 미국이 서로 자기 편이 아니라며 공 받기를 꺼리는 까닭이다. 이 상황에선 더 이상 모두를 만족스럽게 만들겠다는 ‘중재자 환상’에 사로잡혀선 안 된다. ‘촉진자’ 정도로도 곤란하다. 핵을 머리에 이고 사는 ‘당사자’로서 북한과 미국을 설득할 때다. 서울취재본부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