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계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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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11   |  발행일 2019-04-11 제31면   |  수정 2019-04-11
[영남타워]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계
이은경 경제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는 1861년 낙태 금지법을 제정한 이후 157년간 이를 유지했다. 임신부의 생명이 위독한 경우를 제외하고, 낙태를 하면 최고 징역 14년형에 처했다. 수정 헌법이 발효된 이후 약 17만명의 아일랜드 임신부가 영국 등에서 ‘원정 낙태’를 했다. 2012년엔 인도 출신의 31세 할라파나바르가 태아가 생존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으나 불법이라는 이유로 낙태수술을 거부당했다. 결국 태아가 숨지고 나서 수술을 받았지만 후유증인 패혈증으로 숨지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아일랜드 정부는 지난 5월 국민투표를 진행했다. 그 결과 투표 참가자 66.4%가 낙태죄 폐지를 찬성했고 낙태금지를 규정한 1983년의 개정 헌법 제8조는 폐지됐다.

오늘(11일) 우리나라에서도 헌법재판소가 낙태를 처벌하는 현행법의 위헌 여부에 대한 선고를 내린다. 불법 낙태 시술을 받을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하고, 시술한 의사 또한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진다. 1953년 제정된 이래 66년간 유지되어온 법이다.

2012년 헌재는 재판관 4대 4 의견으로 위헌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면서 낙태죄에 대한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태아의 생명권을 중시해야 하고, 처벌조항이 없으면 낙태가 만연할 수 있다는 게 합헌 판단의 근거였다.

이번의 낙태죄 위헌 소송은 2017년 2월 산부인과 의사 A씨가 69회에 걸쳐 낙태 수술을 한 혐의로 기소된 후 헌법 소원을 청구하면서 시작됐다. 낙태죄의 가장 큰 문제는 여성의 몸을 통제 대상으로 본다는 점이며, 낙태의 고통과 무게를 여성에게만 전가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법적으로 낙태에 대한 규정은 낙태가 필요한 여성의 의지를 바꾸지 못한다. 그럼에도 여성들이 안전한 낙태에 접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여성의 건강, 안전, 자기결정권 등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낙태죄는 신체를 국가가 통제하는 상징적인 법조항이 됐다.

분위기는 7년 전과 다르다. 낙태죄 폐지 촉구 집회나 100일 넘게 이어진 헌법재판소 앞 1인 시위에서는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국가의) 처벌도 허락도 거절한다”는 외침이 터져 나오고 있다. 최근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낙태한 여성을 형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을 침해한다는 의견을 제출하기도 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도 한국 정부에 대한 최종 권고문에서 안전하지 않은 여성의 임신중절이 모성사망과 질병의 주요 원인이라며 낙태 합법화, 비 범죄화, 처벌 조항 삭제를 주문했다. 유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위원회도 2017년 같은 취지의 권고를 한 바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불법으로 낙인찍다 보니 현실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는 낙태 수술의 위험이나 부작용도 피할 수 없게 됐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의료 행위는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감독되어야 하며, 전문가 집단이 최선의 진료를 할 수 있도록 증진돼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낙태는 이러한 국가 시스템 밖에 있으며 이 과정에서 여성의 건강은 음성화되고 위험한 시술에 맡겨질 수 밖에 없다. 국가는 여성의 건강을 보호할 책임은 없는가.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대신 살 수 없다. 주어진 삶의 다양한 상황을 가장 깊이 고민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사자뿐이다. 국가의 역할이 그 결정을 의심하고, 징벌하는 것일 순 없다.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삶에 대해 다양한 선택권을 갖고, 국가로부터 충분한 지원과 지지를 받으며, 자신의 미래를 그려나가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판결은 다양한 이유에서 불가피하게 임신을 중단한 여성을 국가가 처벌하는 것이 과연 여성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 것인가라는 단순하면서도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어야 한다. 아이를 낳을 권리만큼 낳지 않을 권리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여성을 처벌하는 것으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회에서는 아무도 미래를 꿈꿀 수 없다. 이은경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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