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복수의 미학

  • 원도혁
  • |
  • 입력 2019-04-01   |  발행일 2019-04-01 제31면   |  수정 2019-04-01
20190401
원도혁 논설위원

갸름한 얼굴의 여배우 줄리아 로버츠가 열연한 영화 ‘적과의 동침’은 탄탄한 구성과 긴박한 상황설정 등으로 호평받은 영화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러 장면들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영화 중 하나다. 부자에다 미남인 남편은 극도의 결백증과 의처증을 지닌 원수였다. 폭력과 간섭을 못견딘 아내가 적(남편)을 응징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원래 여성은 원수가 될 남자를 사랑한다고 했다. 운명이 그렇다면 어쩔 것인가. 하지만 부부의 이상상(理想像)인 비익조(比翼鳥)와 연리지(連理枝), 비목어(比目魚)와 원앙새는 되지 못할망정 원수로 살면서 서로 앙갚음을 한다면 잘못된 만남이다. 비익조는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새로, 날개와 눈이 하나뿐인 새다. 암수가 나란히 붙어야 날 수 있기 때문에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비목어라는 고기도 마찬가지로 눈이 하나뿐이어서 암수가 나란히 붙어 헤엄쳐 다닌다.

살다 보면 도처에 적(敵)이 널려 있음을 체감한다. 그리하여 다들 한두번쯤 고민했을 사안이다. 적에게 당한 치욕적인 모욕을 복수할 것인가, 그냥 참을 것인가. 원한을 원한으로 갚을 것인가, 용서로 갚을 것인가. 원수를 미워할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혼자 고민하기보다는 선각자들의 지혜를 참고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고대 그리스의 시성(詩聖) 호메로스는 ‘일리아드’에서 ‘복수는 꿀보다 달다’라고 했다. 심지어 하나님도 복수하신다. 구약성서에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라는 구절이 있다. 세계 최고의 성문율인 함무라비 법전에는 ‘눈에는 눈, 뼈에는 뼈’로 명기돼 있다. 여호와가 모세에게 전한 율법 출애굽기에는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라고 전한다. 회교 성전인 코란에도 ‘그속에 내가 그들을 위해 정해 놓았으니 생명에는 생명, 눈에는 눈, 코에는 코, 귀에는 귀, 이에는 이, 그리고 다른 상해에 대해서는 그에 맞는 보복이니라’라고 써 놓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되는 되로, 말은 말로’ 갚으라고 양(量)을 적시했다. 해를 입힌 것과 똑같이 되갚아 주는 규칙을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라 한다. 라틴어로 ‘렉스 탈리오니스(lex talionis)’다. 뒤마의 명작 ‘몽테 크리스토 백작’의 복수극은 장쾌하다. 14년간의 무고한 옥살이 후 몽테 크리스토 백작이 되어 적들에게 시원한 복수를 하는 에드몽 당테스의 활극에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신약성서에는 복수하지 말라고 전도한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했다. 불교의 법구경도 참을 것을 권했다. ‘원망으로 원망을 갚으면 마침내 원망은 쉬어지지 않는다. 오직 참음으로써 원망은 쉬나니 이 법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인간이 지나치게 복수를 행하면 신들의 미움을 산다’고 경고했다. ‘복수는 비열한 인간의 기쁨’이라고 비판한 이도 있다. 라틴어 격언에는 ‘당신보다 약한 자가 당신을 해치거든 그를 용서하고, 당신보다 강한 자가 당신을 해치거든 당신을 용서하라’는 구절도 있다. 약자를 용서하는 것은 승리이지만, 강자를 용서하는 것은 굴복이라는 비판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복수할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도 있다. 당한 사실을 아예 잊어버리는 것이다.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모욕을 보복하려면 먼저 그 분노를 잊어버려라’고 했고,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도 ‘용서하는 것은 좋다. 가장 좋은 것은 잊는 것이다’라고 읊었다. 행복론을 저술한 스위스의 사상가 카를 힐티도 ‘모욕을 주는 사람은 용서하기보다는 잊어버리는 편이 낫다’고 했다.

도처에 적이지만 그들을 적대시하고 앙갚음만 하고 살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적들은 항상 적군이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때로는 아군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적들을 용서하고 적들과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 그게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인간의 숙명이다. 원도혁 논설위원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