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의 스토리 오브 스토리 .5] 경제의 시간과 문화의 시간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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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28   |  발행일 2019-03-28 제21면   |  수정 2019-05-01
다 자란 내 자식이 성소수자라면 어떻게 대할 건가요?
201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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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의 소설 ‘딸에 대하여’(민음사, 2017)를 읽고 시대착오적인 현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60을 넘긴 나이에 요양보호사 일을 하는 여인이다. 죽은 남편이 남겨 둔 집 한 채가 있지만 스스로 일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형편이다. 막막한 대로 꾸준히 일을 하는 것이 그녀가 살아나가는 방법이다. 노동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 모두의 숙명, 아무도 자신을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 또한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다.

요양보호사로서 그녀는 ‘젠’이라 불리는 치매 노인 이제희의 수발을 들고 있다. 보호자가 전혀 없는 ‘젠’은 왕년의 인권 운동가이다. 해외 입양아나 외국인 이주민들을 위해 인생을 바쳐 나름대로 저명했던 인물이다. 평생을 다른 사람의 인권을 위해 싸우며 살았지만, 현재의 그녀는 제정신을 찾는 순간이 거의 없이 어린아이 수준으로 퇴행한 중증 치매 환자일 뿐이다.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하고 그대로 흘리며, 매일같이 수발을 들어 주는 보호사도 알아보지 못하는 늙은 육체, 욕창으로 엉덩이가 썩어 들어가는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이 두드러지도록, 주인공이 ‘젠’을 돌보는 과정의 묘사는 매우 핍진하다. 늙고 병이 든다는 것, 정신을 놓는다는 것이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는지를 김혜진은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그려 보인다.

노년의 삶, 병을 안고 세상의 한 귀퉁이에서 쓸쓸하게 시간을 보내는 노경의 삶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로 우리는 김원일의 연작장편 ‘슬픈 시간의 기억’(2001)이나 필립 로스의 경장편 ‘애브리 맨’(2006)을 갖고 있다. 치매 노인을 다룬 경우로는 저 멀리 박완서의 ‘집 보기는 그렇게 끝났다’(1978)에서부터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2008)와 박민규의 ‘낮잠’(2008), 전성태의 ‘이야기를 돌려드리다’(2010) 등까지 적지 않은 작품을 보아 왔다. 이들 소설은 ‘노망’이 ‘치매’로 변화되면서 가족 내 봉양의 대상이던 노인이 치료 시설의 격리 대상으로 바뀌게 된 사회 및 의식의 변화 속에서, 의식적이든 아니든 그에 저항하는 내용을 보였다. 노인에게도 삶이 있으며 치매 환자에게도 그에게 주어지거나 그로부터 흘러나올 소중한 기억이 있다는 맥락에서 말이다.


김혜진作 ‘딸에 대하여’ 성소수자 부정적 인식 강조
“그 애의 엄마인게 부끄러워” 母性 억압할만큼 강고
경제선진국 표방하는 한국의 ‘문화적 후진성’ 증명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는 이러한 흐름에서 다소 벗어나 있다. 치매 노인의 하루하루란 육체가 썩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며 그의 여생이란 자본의 논리에 지배되는 시설들 속에서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이라는 사실, 이 엄정한 현실을 응시하는 까닭이다. 물론 ‘딸에 대하여’가 그러한 보고로만 그치지는 않는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젠’이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수면제 처방을 받아 죽음으로 내몰리는 시설로 옮겨졌을 때 주인공이 제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간호하는 실로 ‘대책 없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노년의 삶, 그것도 정신을 잃은 비참한 삶을 이 소설은 전혀 미화하지 않는다. 이렇게 냉정한 시선으로 병든 노년을 다루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딸에 대하여’는 우리 문단에서 자기의 몫을 확보한다.

‘젠’과 주인공의 스토리라인이 보여 주는 노년의 삶이 작품 전편에 걸쳐 의미 있게 전개되고 주인공 자신이 겪는 육체의 쇠약도 사실적으로 그려지지만, ‘딸에 대하여’가 노인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소설은 아니다. 제목이 알려 주듯 이 작품의 초점은 주인공과 딸의 문제에 놓여 있다.

남들과 같은 일상을 지키는 것, 남의 눈에 띄지 않고 평온한 삶을 사는 것이 주인공의 바람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 대학 시간강사로 일하는 딸이 경제적인 문제로 집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혼자가 아니라 ‘레인’이라는 또래 여자와 함께 왔기 때문이다. 7년이나 함께 살아 온 그들의 관계를 주인공은 인정할 수 없다. 그들을 지칭하는 언어조차 떠올릴 수 없다.

‘그 애’가 아니라면 자신의 딸이 남들처럼 결혼해서 자식도 낳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그녀의 마음에 있고, 자신이 그런 기대를 놓는 순간 딸애에 대한 어미로서의 책임까지 놓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서 주인공은 딸애를 현재 모습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레인’에게 냉정하게 대한다. ‘다 자란 자식이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사는 걸 봐야 하는 기분’(68쪽)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이다.

이들 모녀의 관계는 어떻게 풀리는가. 소설의 독자로서 우리가 가지게 마련인 이러한 질문에 작가는 답을 주지 않는다. 답이 있다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젠’을 함께 돌보는 동안 모녀의 문제가 유보될 뿐이다. 주인공의 딸 ‘그린’은 성 소수자로서 현재 모습 그대로 ‘그냥 나’일 뿐인데(107~8쪽), ‘젠’의 장례를 치르는 작품의 말미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은 그런 딸애를 자신이 어떻게 대하게 될지 알지 못해 고민한다. 모녀의 관계를 자의적으로 푸는 대신 ‘딸에 대하여’는 성 소수자의 삶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거부되는지를 보여 준다. 동성애자라는 사실 때문에 대학 강단에서 쫓겨나는 이들이 있다. 그런 동료를 위해 나서는 바람에 주인공의 딸은 경제적 자립을 이루지 못하고, 시위 도중에 군중에게 몰매를 맞기까지 한다. ‘레인’이 제 돈을 내고서도 주인공에게 없는 사람처럼 괄시를 받는 것 또한 스토리 차원에서 명백하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딸이 잘 살기를 바라는 주인공이 “나는 그 애의 엄마라는 걸 부끄러워하는 내가 싫어요. 그 애는 왜 나로 하여금 그 애를 부정하게 하고 나조차 부정하게 하고 내가 살아온 시간 모두를 부정하게 만드는 걸까요”(84쪽)라고 독백하는 데서 보이듯 성 소수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모성을 억압할 만큼 강고하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맹목의 시선으로 작품 전체가 서술된다는 사실에 ‘딸에 대하여’의 또 한 가지 미덕이 있다. 누구도 아무것도 쉽게 변치 않는다는 것을 작가는 안다. 그래서 성 소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협하고도 잘못된 인식이 얼마나 강고한지를 무시하지 않고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작품화한 것이다. 이러한 처리 방식이 2010년대가 다해 가는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터이다. 작가의 이러한 처리 방식은 경제적 선진국을 표방하는 대한민국의 문화적 후진성을 증명한다. 미국 연방 대법원이 미국 전역에서의 동성결혼을 합헌이라고 결정한 것이 2015년 6월이다. 그 전까지도 36개 주에서는 합법이었다. 작년 미국 체류 기간 동안 나와 딸애가 자주 다녔던 공립도서관은 출입구 한가운데에 전시하는 책들의 주제로 ‘LGBTQ’를 자연스레 내세우기도 했다. 이런 미국도 늦은 편이다. 네덜란드는 2001년에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그 이후 스페인, 캐나다, 프랑스, 독일 등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르헨티나, 대만 등을 포함하여 40개 국 가까이가 동성결혼을 인정하고 있다.

동성결혼이 인정되는 나라에서 ‘딸에 대하여’와 설정이 비슷한 소설이 나왔다면 어떻게 읽힐까. 딸 개인의 타고난 성적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늙은 어머니의 구시대적인 걱정을 노년의 문제와 더불어 묘파한 작품으로 간주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작가가 다른 나라에서 썼다면 그만큼 달리 썼겠지만, 이렇게 전혀 달리 읽힐 수도 있다는 점을 나는 외면할 수 없다. 이 글이 노년의 문제와 성 소수자 이야기가 ‘딸에 대하여’에서 분리된 것인 양 나누어 말한 것도 이러한 사정에 닿아 있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30-50 클럽’에 가입했으면서도 문화적으로는 선진적이지 못한 나라에 산다는 시대착오적인 현실이, 한 편의 소설과 그것을 읽고 평하는 일 모두를 삐딱하게 만들고 있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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