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그 중심에 선 대구·경북인 .6] 경북 3·1운동의 절정기

  • 임훈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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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21   |  발행일 2019-03-21 제14면   |  수정 2019-03-21
日 폭정에 맞서 무력투쟁…억압의 상징 면사무소·주재소 15곳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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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군 영해면소재지 중심부인 영해로터리 한가운데에 자리한 ‘영해 3·18독립만세운동기념탑’.

1919년 3월 초 대구와 포항, 의성 등지에서 3·1운동의 횃불이 타오르면서, 만세운동의 열기는 경북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3월 중순이 되자 영덕과 안동, 의성 등지에서 각각 수천여 명이 참여한 만세운동이 벌어지며 경북의 3·1운동은 절정기를 맞는다. 만세운동의 강도도 강해졌다. 경북독립운동사에 따르면 경북 전체에서 1천532명이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군경에 체포됐다. 영덕과 안동에서만 각각 489명과 392명이 체포됐으며, 의성(190명)과 칠곡(135명), 성주(133명)가 그 뒤를 이었다. 체포자가 많다는 것은 경북지역 만세운동의 격렬함이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북독립운동사는 ‘1919년 4월25일 현재 경북지역에서만 8곳의 면사무소와 7곳의 경찰관서가 파괴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의 말단 식민통치기구인 면사무소와 주재소가 민중이 가장 자주 접하는 억압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는 3·1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경북지역에서만 15회에 걸쳐 총기를 사용하는 등 무자비한 진압에 나섰다. 일제의 탄압에 맨몸으로 맞서며 누적된 민중의 분기가 관공서 파괴와 대규모 군중시위로 이어진 것이다.

#1. 기념비에 깃든 독립의 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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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당시 금융기관인 영해금융조합 건물.

영덕의 3·1운동은 경북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대표적인 무력 항일 투쟁으로 전개됐으며, 경북 3·1운동의 절정기인 1919년 3월 중후반에 집중돼 있다. 특히 영덕 북부지역인 영해·병곡·창수·축산면에서 열린 대규모 만세운동은 ‘영해(영덕) 3·18 독립만세의거’로 지칭되며 특별히 기념되고 있다. 1919년 3월18일부터 21일까지 영덕 일원에서 3천명(경북독립운동사 기준)에 가까운 민중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항거했다.


영덕서 3일간 민중 3000명 시위
강렬한 위세에 순사도 만세외쳐
日 어부·소방조원까지 진압나서

안동선 14회 걸쳐 1만여명 참여
392명 체포되고 168명 실형받아
청송·영양·봉화 등 각지로 확산
日, 경북에서만 총기 15회 발포



3·1운동 이후 100년이 지났지만 영덕군민들은 그날의 결기와 함성을 잊지 않고 있다. 영덕군민들은 매년 3월마다 영해면 영해만세시장 거리에서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행진을 펼치며 만세운동을 재현한다. 영해면 성내리 영해로터리에 자리한 ‘영해 3·18독립만세운동기념탑’과 면소재지 외곽 언덕에 자리한 ‘3·1의거비’는 독립을 향한 영덕군민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영해 3·1의거비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외쳤던 만세소리는 동해의 파도소리보다도 더 높았었다(중략) 그 뜻을 새겨 겨레의 갈길을 삼으리라”고 적혀있다.

#2. 치열했던 영덕의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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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영덕 3·18 독립만세 문화제’를 앞둔 지난 11일, 영해만세시장 앞 거리 위로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영덕의 3·1운동 역시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열린 만세운동에서 비롯됐다. 당시 지품면 낙평동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助事) 김세영은 서울의 만세운동을 접한 후 영덕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품면으로 돌아온 김세영은 3월12일 기독교 구세군 정위(正尉) 권태원에게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알린다. 김세영은 권태원을 만난 자리에서 파리강화회의 소식 등을 전하며 영덕에서도 만세의거를 일으킬 것을 권유했다. 제1차세계대전 전승국들의 전후 처리 회의인 파리강화회의에 3·1운동 소식 전해진다면 조국의 독립을 앞당길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3월15일이 되자 권태원은 병곡면 송천동 예수교 장로교회 정규하와 남여명, 남효직, 권상호 등을 만나 동지를 규합하고 거사를 일으킬 것을 다짐한다. 이들은 “예수교도 및 이름있는 선비를 규합하여 3월18일 영해시장(성내리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나서자”는 정규하의 권유로 영해장날인 3월18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이들과 뜻을 같이하는 이상화, 서삼진, 조영한, 권영조, 김원발, 손영세, 남교문, 김치운 등도 자신이 사는 마을의 주민과 친척, 기독교인들을 설득해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결의했다.

거사일인 3월18일 오후 1시가 되자 영해시장에 모인 1천여명(3천여명이라는 기록도 있다)의 군중은 태극기를 꺼내들고 만세를 외쳤다. 당시 영해시장은 지금의 영해만세시장보다 남쪽에 자리한 옛 영해금융조합 건물 주변이다. 성난 군중은 장터 언덕에 자리한 영해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나라 잃은 백성의 울분을 토했다. 이후 영해면에서 병곡면에 이르기까지 만세의거 행렬이 이어졌다. 영해면의 소식을 접한 창수면에서도 3월19일 정오부터 700여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펼쳤다.

영덕의 만세운동은 시위형태가 매우 적극적이면서 무력을 사용했다는 특징이 있다. 영해시장 만세시위 당시‘독립만세를 부르라’고 호통치는 군중의 위세에 억눌린 순사들이 ‘독립만세’를 외칠 정도였으니 시위대의 위용을 짐작할 만하다.

만세운동 행렬을 해산하기 위해 출동한 영덕경찰서장과 직원들까지 영덕군민들에 의해 감금되는 등 투쟁의 강도도 높았다. 영해주재소를 비롯해 영해공립보통학교, 공립심상소학교, 영해면사무소, 영해우편소, 병곡주재소, 창수주재소 등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영덕군민들에 의해 전파 혹은 반파됐다. 이에 일제는 포항헌병대, 평해헌병분견대, 대구의 보병18연대까지 동원해 만세운동 진압에 나섰다. 영덕군민의 저항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강구항에 정박 중이던 일본 어선의 어부 60명과 일본 재향군인 및 소방조원들까지 시위 진압에 동원됐다.

일제의 강경한 진압 탓에 영덕군민이 입은 피해는 컸다. 경북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영덕의 3·1운동 과정에서 8명의 영덕군민이 일경의 총탄에 맞아 즉사했고, 16명이 부상당했다. 3·1운동이 끝나자 수백명에 이르는 영덕군민이 체포됐으며 이들중 159명이 실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3. 경북 각지에서 타오른 3·1운동의 횃불

안동의 3·1운동 열기도 뜨거웠다. 안동의 3·1운동은 1919년 3월13일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동생인 이상동(李相東)의 1인 시위부터 3월27일 풍남면 하회시위에 이르기까지 총 14회에 걸쳐 진행됐으며 총 1만여명이 참여했다.

3월17~27일이 안동 3·1운동의 절정기였다. 3월18일부터 시작된 안동면의 2차 만세운동이 자정을 넘어서자 시위의 양상이 바뀌었다. 이때부터는 식민통치 기관에 대해 과감한 공격을 감행하는 등 무력 투쟁 양상을 보인다. 면사무소 5곳과 주재소 3곳이 파괴됐을 정도로 격렬한 저항이 이뤄진 것이다. 이 기간 안동·예안·임동면에서는 각각 1천500~3천명에 이르는 대규모 군중이 조직돼 일제에 항거했다.

특히 3월23일 안동면 3차 만세운동의 피해가 컸다. 경북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이날 만세운동에만 안동군민 3천명이 참여했다. 안동군민들은 “경찰서와 법원 안동지원을 파괴하고 구금된 자를 구출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두 기관으로 밀고 들어갔고, 이 과정에서 수비대의 발포로 30여명이 숨지고 50여명이 부상당했다. 경북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안동의 3·1운동으로 재판에 넘겨져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만 168명이다. 가장 격렬한 시위를 펼친 임동에서는 67명의 수형자 중 2년 이상의 중형을 받은 사람이 58명이나 됐다. 특히 임동 만세운동을 주도한 류연성은 7년을 선고받고 끝내 옥사하는 등 안동지역 3·1운동의 투쟁성과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경북 3·1운동의 초기 발생지인 의성에서도 지속적인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3월19일 안평면에서 열린 도리원장터 만세운동이 대표적이다. 3월12일 비안면의 만세운동 이후 시위 지역과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의성군의 교통요지인 도리원장터에서 만세운동이 펼쳐진 것이다. 도리원장터 만세운동에만 1천여명의 의성군민이 참여했으며 이는 의성 3·1운동의 절정기로 평가받는다. 도리원장터를 폐쇄한 일경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9명이 총상을 입고 1명이 숨졌다. 이밖에도 경북 3·1운동의 절정기였던 1919년 3월 중후반, 청송과 영양, 봉화 등 경북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인 3·1운동이 펼쳐졌다.

글=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대구독립운동사. 경북독립운동사. 영해3·18독립만세의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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