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제로 섬 게임

  • 이하수
  • |
  • 입력 2019-03-19   |  발행일 2019-03-19 제31면   |  수정 2019-03-19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의 L. C. 더로 교수가 1980년에 쓴 책의 제목 ‘zero-sum society’(제로 섬 사회)는 그대로 사회학 용어가 됐다. 이 용어를 게임에 대입하면 제로 섬 게임이다.

우리나라 민화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제로 섬 게임은 ‘의좋은 형제’다. 추수를 마친 형제는 서로 상대방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생각하여 밤에 자신의 볏가리에서 볏단을 덜어 내어 형은 동생 볏가리에, 동생은 형의 볏가리에 가져다 쌓아 놓는다. 밤에 똑같은 행동을 하다보니 낮에 확인한 볏가리는 변동이 없다. 다음날 밤 또 볏단을 옮기던 형제는 중간 지점에서 맞닥뜨려 서로의 심정을 간파하면서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의좋은 형제는 충남 예산군의 효자이자 우애가 좋았던 이성만·이순 형제의 실제 이야기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거국적인 제로 섬 게임은 지자체들 간의 ‘인구 늘리기 경쟁’에서 볼 수 있다. 인구 증가 경쟁은 주민등록 주소 옮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말단 공무원들이 현금을 주거나 쓰레기 봉투 등을 무료로 나눠주며 주민등록 이전을 종용하는 행태가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인구 10만명을 턱걸이하고 있는 상주시는 그것에 더 목을 매는 모습이다. 동사무소 직원들이 경북대 상주캠퍼스와 상주공고에 찾아가서 학생들을 상대로 현금을 제시하며 주민등록 이전을 구걸하기까지 한다. 상주시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농어촌은 고령화가 꽤 진행돼 있어 인구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서 주민등록 이전 몇 건으로 인구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담당 공무원들은 너무 잘 알고 있다. 뻔히 알면서 그 일을 해야 하는 공무원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다. 행정력 낭비는 또 얼마나 큰가?

의좋은 형제는 볏가리는 변동이 없지만 형제애는 더 깊어졌을 것이기에 서로 이기는 논(non) 제로 섬 게임이 된다. 반대로 서로 볏단을 훔쳐내는 상황이었으면 어땠을까? 부둥켜안고 감격해 우는 대신 코피가 터지고 박이 깨지도록 싸웠을 것 아닌가? 서로 손해 보는 논 제로 섬 게임이 된다. 주민등록 옮기기 경쟁 역시 볏단 훔쳐내기처럼 인구는 늘리지 못하고 행정력만 낭비하는 논 제로 섬 게임 아니겠나? 그 꼴을 그냥 지켜만 보고 있는 중앙정부는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셈이고. 주민등록지 옮기기 경쟁을 금지하는 강제력이 필요한 때다.
이하수 중부지역본부 부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