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중국에서 이육사 시인과 의열단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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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15 00:00  |  수정 2019-03-15
20190315

 3·1절 및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더불어민주당 대구시당에서는 지난달 21일부터 24일까지 중국 화북·화중지역 항일 유적을 탐방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번 탐방 루트는 베이징을 거쳐 황허를 가로지르는, 중국 대륙의 심장부인 중원지역까지 4천㎞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상하이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 집중된 항일 역사 루트를 벗어나 베이징을 거쳐 조선의용군의 빛나는 십자령 전투지인 태항산맥 일대까지 답사하는 보기 드문 기획이었다.
 

베이징 탐방에서 가장 가슴 뛰는 장소는 안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활동하다 베이징감옥에서 옥사한 이육사 시인과 영천 출신 독립운동가 이원대 의사의 순국지였다. 순국장소는 옛 일본 영사관 헌병대 건물로 지하 감옥이 있었던 곳이다. 하지만 입구부터 쓰레기가 쌓여 있고 건물 밖이나 안에는 아무런 표지도 없다. 이곳 지하 감옥에서 이원대 의사가 고문 끝에 1943년 6월17일 옥중 순국했다. 이듬해 1월16일 이육사 시인 또한 모진 고문 끝에 옥중 순국했다. 옥중 유언 시 ‘광야’가 이 감옥에서 탄생되었다. 이 건물들은 다행히 옛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현재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그야말로 흉가처럼 버려진 미개발 주거지다. 건물의 상당 부분은 오래전부터 폐쇄된 상태다.
 

현재 베이징에서 그나마 흔적이나 찾아볼 수 있는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는 이곳을 포함해 몇 곳에 불과하다. 하루가 다르게 끊임없이 추진되는 재개발 속에 독립투사의 흔적 대부분이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이곳도 조만간 철거될 운명을 맞을 우려가 크다. 중국지역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보호가 임시정부 청사를 중심으로 이뤄지다 보니 베이징도 상하이와 함께 항일독립운동 중심지였음에도 보존 및 관리가 너무나 소홀한 것이 아닌가 싶어 진정 가슴이 쓰렸다. 이육사·이원대 의사의 베이징감옥 보존을 위한 주중 한국대사관과 외교부의 적극적인 노력을 부탁한다.
 

중국대륙의 중원지역인 허난성 한단시(邯鄲市)의 진기로예(晉冀魯豫) 열사릉원에는 조선의용군의 선도자였던 윤세주굛진광화 열사의 묘지가 있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는 명당이며, 마치 공원과 같이 잘 꾸며져 있다. 많은 시민이 산책을 하고 운동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베이징 항일 유적지와는 사뭇 달랐다. 묘소에는 ‘윤세주 열사’라는 한글 이름이 또렷이 적혀있다. 경남 밀양 출신의 윤세주는 어떻게 고향에서 수만리 떨어진 태항산 기슭에 영면하게 되었을까.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열단 창립 멤버이자 조선의용군이었던 윤세주는 1920년 의열단 창립 당시 19세로 가장 어린 단원이었다.
 

10년 전 1910년 11월3일 밀양의 김원봉굛윤세주 두 어린이는 일왕의 생일 행사에 쓸 일장기를 변소에 처박아 버리는 ‘대불경’ 사건을 저지른 싹이 파란 독립군 꿈나무였다. 태항산 전투에서 윤세주굛진정화 두 열사의 희생 대가로 퇴로를 확보한 중국공산당은 후일 두 열사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렀다. 정작 우리는 윤세주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덩샤오핑보다 낯선 윤세주가 아닌가! 타국 땅에 고이 잠드신 열사를 생각하니 울컥했다.
 

탐방 일정 마지막 날 북미정상회담을 위해 김정은 위원장의 열차가 베이징을 지나고 있었다. 100년 전 독립열사들의 피와 땀이 광복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독립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완전한 독립’이 되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남과 북은 분단됐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가올 100년은 한반도가 평화통일이 돼 동북아는 물론 세계평화와 번영을 위해 앞장서야 할 것이다. 베이징 평양 옥류관에서 이 여정의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대한민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고맙습니다. 애국열사들이여!”

 김 태 형  (대구달서구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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