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40 끝] 대구 운림구곡(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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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봉규기자
  • 2019-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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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한 금호강, 정구·서사원 선생의 도학이 흐르는 듯…

운림구곡은 우성규가 금호강 하류에 설정한 구곡이다. 운림구곡 중 6곡 연재 주변 풍경. 연재는 이락서당을 말한다.
6곡에 있는 이락서당. 이락서당은 낙재 서사원과 한강 정구의 학덕을 기려 건립됐다.

3곡 송정은 어대에서 1.4㎞ 정도 거슬러 올라간 곳으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소나무들이 많았겠으나, 1970년대 이후 강폭을 좁혀 제방을 쌓고 성서산단이 들어서면서 주변의 물길은 옛모습을 많이 잃었다.

‘삼곡이라 솔바람 배에 가득 불어오니(三曲松風滿載船)/ 푸른 수염 붉은 껍질 몇 해나 묵었는가(蒼髥赤甲幾經年)/ 초연히 가시와 덤불 속에 우뚝 서서(超然特立荊榛裏)/ 추위에도 곧은 모습 정말로 어여쁘네(寒後貞姿正自憐)’

송정에서는 소나무의 늠름한 기상을 노래하고 있다. 송정에서 1.6㎞ 거슬러 오르면 4곡 오곡이다. 강물이 완만하게 굽이를 이루는 곳인데 주변에 강정들과 산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름을 오곡(梧谷)이라 한 것을 보면, 오동나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우성규는 여기서 오동나무를 보고 오동나무로 만드는 거문고를 떠올렸다.

‘사곡이라 외로운 오동 바위 곁에서/ 흔들리는 가지의 이슬 맺힌 잎 푸른 빛 드리우네/ 거문고 옛 곡조를 누가 알겠는가/ 출렁출렁 물 흐르고 달빛은 못에 가득하네’

5곡 강정은 부강정(浮江亭)을 말한다. 부강정은 다사읍 죽곡리 강정마을에 있었다. 신라 때 처음 건립된 정자다. 정구와 서사원, 손처눌 등 많은 선비들이 노닐었다.

‘오곡이라 배를 저어 깊은 마을 찾아드니(五曲行舟入洞心)/ 돌기둥 높다랗게 성근 숲에 솟아있네(巍然石楫出疎林)/ 이 사이에 진실로 뛰어난 선비 있었으니(此間有奇士)/ 평생토록 벼슬살이 마음 쓰지 않았네(爵祿平生不入心)’

5곡에서 백이숙제의 선비정신을 떠올린다. 이곳에서 도학을 연마하던 뛰어난 선비들처럼 자신도 벼슬에 대한 마음을 버리고 도학을 완성하려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3곡 송정, 소나무의 기상을 노래
성서산단 들어서며 옛모습 잃어

6곡 연재는 ‘이락서당’을 일컬어
정구·서사원 선생 후학들이 세워

7곡 선사, 다사출신 학자 강학처
선비들 선유 자취 가장 잘 나타나

9곡 사양서당 정구가 만년에 지어
死後 사라졌다 제자 등이 재건립



◆6곡 연재는 강창교 부근 이락서당

6곡 연재는 강정에서 1.4㎞ 정도 거슬러 오른 곳에 있는 강창교 부근이다. 연재(淵齋), 즉 못가에 있는 재실은 이락서당(伊洛書堂)을 말한다. 당시의 이락서당은 지금보다 낮은 곳에 있었으나, 강창교가 생기면서 강창교보다 약간 높은 위치로 옮겨 개축했다.

이락서당은 정구와 서사원의 강학처에 후학들이 세운 것이다. 서사원은 정구의 제자이다. 정구와 서사원의 학문은 대구의 선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두 사람에게 배웠던 11개 마을 아홉 문중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학계(學契)를 조직하고, 두 스승의 학문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1798년 강창(江倉)의 파산(巴山) 자락에 이락서당을 건립했다.

‘육곡이라 푸른 물굽이에 낚시터 있으니(六曲釣磯在碧灣)/ 인간세상 영욕과는 무관한 곳이네(世間榮辱不相關)/ 못가에 다가가서 집 이름 생각하니(臨淵想像扁齋意)/ 푸른 물 유유하고 밝은 해 한가롭네(綠水悠悠白日閒)’

이락서당 편액을 보며 우성규는 두 선생을 떠올렸다. 이락(伊洛)은 이천(伊川)과 낙강(洛江)에서 한 글자씩 가져온 것이다. 서사원의 거처는 이천에 있었다. 정구는 성주, 칠곡, 대구 등 낙동강 연안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니 이락은 정구와 서사원을 의미한다. 또한 이락서당의 협실 편액도 모한당(慕寒堂)과 경락재(景樂齋)라 하여, 두 사람을 경모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온 두 선생의 도학을 자신도 이어받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곡은 선사다. 6곡에서 4㎞ 정도 거슬러 오른 지점이다. 선사는 신라 때 창건된 고찰인 선사암이 있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선사암은 마천산에 있는데, 암자 곁에 최치원이 벼루를 씻던 못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1832년경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부읍지’에는 ‘선사암은 부 서쪽 20리에 있었는데 예전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사는 다사 출신의 학자들이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처음 이곳에 강학처를 연 사람은 다사 문양 출신의 임하(林下) 정사철(1530~1593)이다. 정구와 김우옹(1540~1603) 등과 교유했으며,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모집해 관군을 도왔으며, 1587년에 선사서사를 지어 강학하고 주변 선비들과 교유했다. 선사서사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자 서사원이 뒤를 이어 그 터에 선사재를 지어 제자를 가르쳤다. 또한 선사는 선유(船遊)의 자취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호선사선유도가 이를 잘 보여준다. 서사원은 1601년 2월 자신의 거처인 금호강 이천에 완락재를 지어 낙성했다. 3월에 낙성을 축하하러 장현광을 비롯한 선비 22명이 찾아왔다. 이들은 의기투합, 서사원을 금호선사선유의 주인으로 삼아 부강정까지 10리를 내려가 시회를 열었다. 감호(鑑湖) 여대로는 금호선사선유도 서문에 그날의 선유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칠곡이라 굽이도니 또 하나의 여울인데(七曲沿回又一灘)/ 구름 속에 춤추는 학 정히 볼 수 있겠네(雲中鶴舞正堪看)/ 그 가운데 혹여 신선이 있는가(箇中有仙人否)/ 바위 사이 차가운 집 웃으며 가리키네(笑指巖間白屋寒)’

이 굽이에서는 신선의 경지에 노닐던 최치원을 떠올리고 있다.

8곡은 강가에 있는 바위산 봉암이다. 선사에서 6㎞ 정도 상류에 있다. 와룡대교를 마주하고 있는 바위산이다. 다리와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많이 잘려나간 상태다.

‘팔곡이라 바위 높고 묘한 경계 열리니(八曲巖高妙境開)/ 봉우리들 늘어선 데 물결 휘어 도네(群峰羅列衆坡)/ 산에 가득한 아름다운 기운 새들이 먼저 아니(滿山佳氣禽先得)/ 아침 햇살에 날갯짓하며 봉황이 내려 앉네(翼翼朝陽鳳下來)’

마지막 9곡 사양서당은 8곡 봉암 건너편 칠곡군 지천면 신동서원길에 있다. 사양서당은 원래 정구가 만년에 지어 학문에 몰두하며 제자를 가르치던 사양정사(泗陽精舍) 터(대구 북구 사수동)에 건립됐다. 정구 별세 후 사양정사는 없어지고 1651년 제자와 마을사람들이 그곳에 사양서당을 건립해 정구를 배향했다. 그러나 1694년 칠곡군 지천면 웃갓마을로 이건되고 빈터만 남아있었으나, 대구 금호택지개발지구 내 한강근린공원이 조성되면서 사양정사가 복원되었다.

‘구곡이라 서림 깊고 맑으니(九曲書林然)/ 봄이 오자 꽃과 버들 앞내에 가득하고(春來花柳滿前川)/ 강옹과 담로 향기 남은 이 땅에는(岡翁潭老遺芬地)/ 밝고 밝은 이치 고요 속에 빛나네(一理昭昭靜裏天)’

강옹과 담로는 한강 정구와 석담 이윤우를 말한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 ‘구곡기행’ 연재는 대구와 경북의 구곡문화 학술조사 연구단(연구 책임자 김문기) 연구 결과물로 경북대 퇴계연구소가 경북도·대구시와 함께 펴낸 ‘경북의 구곡문화’ Ⅰ·Ⅱ권과 ‘대구의 구곡문화’를 비롯한 기존의 연구성과 덕분에 잘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연재기사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격려를 보내준 독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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