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그 중심에 선 대구·경북인 .5] 경북 각지에서 울려퍼진 만세 함성

  • 임훈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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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07   |  발행일 2019-03-07 제14면   |  수정 2019-03-20
포항서 시작된 경북의 만세운동…석달간 1만6500여명이 격렬한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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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11일 3·1 운동이 열린 포항 여천시장(구 포항아카데미 극장 일원)의 모습. <포항시 3·1운동연구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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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3·1운동을 이끈 포항제일교회 관련자 사진(1927). 사진 뒷줄에 최경성, 송문수 장로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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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북구 중앙동 옛 포항제일교회(현 포항소망교회) 전경. 3·1운동 당시 포항교회 신도를 비롯한 포항의 기독교계는 대구의 3·1운동 소식을 접하고 만세운동 거사를 실행했다.

1919년 3월8·10일, 대구 서문시장과 남문밖시장에서 울려퍼진 만세 함성의 물결은 경북 각지로 퍼져나갔다. 대구의 3·1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고향을 찾아 만세운동의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울의 봉기 소식이 경북 각지에 전해지면서 3·1운동 확산에 불을 지폈다. 유림들은 고종황제 장례식 참석차 서울로 향하다 3·1운동 소식을 들었고, 기독교인들은 신학을 배우기 위해 서울과 평양으로 가다 3·1운동을 접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경북도 발간 ‘경북독립운동사’는 경북지역 3·1운동 발단기를 1919년 3월 초·중반으로 보고 있다. 현재의 경북지역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3월10일 영일군 포항면, 3월12일 의성군 비안면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면서 경북 전체로 만세운동의 열기가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포항 기독교인 주도로 3월10일 첫 만세
다음날 11일 여천시장엔 1천여명 몰려
12일에도 교회신도 수백명이 시내 진입

의성선 3∼4월, 23일에 걸쳐 21회 시위
대구 거사에 고무된 학생들이 적극 나서
일본인교장의 퇴학 협박에도 함성 외쳐


#1.치열했던 경북의 3·1운동

경북의 3·1운동은 전국 어느 지역보다 강렬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의 조사에 따르면 경북지역의 3·1운동 봉기횟수는 40회로, 848회에 달하는 전국 봉기횟수에 비해 적다. 하지만 1만6천500여명의 경북도민이 만세운동에 동참해 전국 참여인원의 28.7%를 차지했다. 이 기록은 경북 27개 지역에서 1천532명이 구속됐고 25명이 사망했으며, 69명이 부상당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경북지역의 3·1운동 사상자가 일본 측 기록보다 훨씬 더 많다는 의견도 있다. 독립운동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919년 3~5월 경북 3·1운동의 사망자 수를 1천200여명으로 보고 있다. 당시 일본 측 기록이 50명 미만 규모의 만세운동을 제외했고, 만세운동 이후 사망자가 포함되지 않았기에 사망자 수가 큰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분석된다. 박은식이 중국 상하이에서 자료를 수집했기에 부정확한 기록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경북의 3·1운동이 격렬하게 이뤄졌음을 증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2. 포항으로 번진 3·1운동 열기

대구를 제외한 경북지역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시작된 곳은 포항이다. 포항의 3·1운동은 3월10~12일 영일군 포항면 일원에서 전개됐으며 대구처럼 기독교계가 주도했다.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 신도와 부설 영흥학교 교직원들이 포항면의 3·1운동을 이끌었다. 1910년대를 전후해 지역 곳곳에 들어선 교회가 3·1운동을 통해 민족문제에 참여한 것이다.

포항 최초의 3·1운동은 3월10일 오후 12시 포항면 내 영흥학교에서 기독교인 교직원 등 60여명이 ‘독립만세’를 외친 것이다. 이튿날인 3월11일에는 포항교회 신도 등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1천여명의 군중이 포항면 여천시장(구 포항아카데미극장 일원)에 모여 만세 함성을 외쳤다. 이날 만세시위는 포항면뿐만 아니라 인근의 흥해와 기계, 오천지역의 기독교인들까지 가세해 이뤄졌다. 군중은 만세를 부르고 독립선언서를 벽에 붙이는 등 시위행진을 벌이며 일제에 항거했다. 11일 만세운동은 일군경에 의해 강제해산됐지만, 다음날인 12일 오후에도 포항교회에 모인 신도 수백명이 등불을 들고 시내로 진입해 다시 한 번 만세운동을 펼쳤다.

1919년 3월15일자 매일신보는 포항의 3·1운동에 대해 “11일부터 12일에 이르기까지 형세가 불안하고 지금도 소요가 일어날 염려가 있으므로 경찰서원과 헌병이 출동해 해산케 하고 10일 오후 12시 북본정 예수교 학교(영흥학교)에 60여명이(중략) 학교 서편 언덕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후략)”라는 내용의 기사로 포항의 소식을 전했다.

#3.치밀한 계획 하에 이뤄진 거사

포항의 만세운동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포항교회를 중심으로 모인 기독교인들이 일찌감치 거사준비를 했기에 가능했다. ‘경북독립운동사’와 ‘포항의 3·1운동사’에 따르면 포항교회 장로 송문수와 같은 교회 장로로 영흥학교 교감이었던 최경성은 장운환, 이봉학, 이기춘 등을 만나 3월2일부터 대구와 보조를 맞춰 거사를 계획했다. 4일부터는 포항교회 신도를 중심으로 만세운동 준비가 이뤄졌다.

최경성과 송문수는 3월8일 열린 대구의 제1차 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 대구의 만세운동이 이만집 목사 등 기독교계를 주축으로 이뤄졌기에 포항의 기독교인들도 거사에 동참해 힘을 보탠 것이다. 최경성이 대구 만세운동 중 일제에 의해 검거됐지만, 일군경의 체포를 피한 송문수가 9일 포항으로 돌아오면서 포항의 만세시위는 급물살을 탄다.

송문수의 도착 소식이 알려지자 포항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둘 씩 송문수의 집에 모였다. 포항교회 영수이자 영흥학교 교사였던 장운환과 함께 각각 포항교회 집사와 신도인 이봉학, 이기춘이 송문수의 집을 찾았다. 송문수는 이들을 만난 후 인적이 뜸한 곳으로 데려가서는 “회의(파리 만국평화회의)에서 오는 3월28일까지 조선인민이 소요하고 있으면 독립을 허용해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것(중략). 그래서 조선 각지에서 인민이 시위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며 만세운동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송문수의 주장에 동조한 기독교인들은 포항에서도 대구와 같은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하고, 포항장날인 3월1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이들은 거사 전날인 10일부터 만세운동에 동참할 사람을 모았지만 이기춘과 이봉학이 일경에 검거되면서 포항의 만세운동은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만세운동 주동자들이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11일 포항교회 신도 수백명이 교회와 장터에 모였다. 금세 1천명으로 불어난 군중이 만세행진을 펼쳤고 포항의 만세운동은 성공할 수 있었다. 주동자가 없는 상황에서도 민중의 독립의지를 거침없이 드러낸 것이다. 포항면의 만세운동으로 송문수는 징역 6월, 이기춘과 이봉학은 징역 5월, 장운환은 징역 4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특히 포항면 만세운동 주도자들은 미수범이었지만 실형이 선고됐다는 점에서 포항의 3·1운동이 일제가 긴장할 만큼 치밀한 계획 하에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4.경북 각지로 뻗어나간 3·1운동

포항에 이어 의성군에서도 독립만세 함성이 울려퍼졌다. ‘경북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의성군에서는 3월12일부터 4월3일까지 23일에 걸쳐 21회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비안면에서는 3월12일부터 16일까지 5차례의 만세운동이 펼쳐져 의성지역은 물론 경북 각지로 만세운동이 확산되는 데 한몫했다.

의성의 3·1운동은 평양과 대구의 만세운동에 고무된 학생과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됐다. 의성의 첫 만세 함성은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해 터져나왔다. 비안공립보통학교 4학년인 박만녕, 우희원, 박기근, 정인성 등의 학생들이 주축이 됐다. 당시 박만녕을 비롯한 학생들은 서울과 평양, 대구의 의거를 접하고 고무돼 있었다.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3월11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정보가 새나가면서 실패했다. 이후 학생들은 일본인 교장의 퇴학 협박에도 불구, 이튿날인 3월12일 오전 11시 학교 뒷산 목단봉에 올라 만세를 외쳤다.

3월12일 정오, 비안공립보통학교에서 5㎞ 떨어진 비안면 쌍계동에서는 쌍계교회 신도들이 주축이 된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신학 공부차 평양에 갔던 안평면 괴산교회 조사(助事) 김원휘가 3·1운동을 접하고는 쌍계동으로 돌아와 봉기 소식을 전한 것이 만세운동의 발단이 됐다. 또한 제1차 대구 만세운동에 참여한 계성학교 학생 박상동이 대구의 상황을 쌍계동에 전하면서, 비안면의 만세운동 계획은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밖에도 구미 진평동에서 3월12일부터 3일간 4회에 걸쳐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15일 경주에서도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이후 경북의 3·1운동은 포항과 의성을 비롯해 안동, 영덕, 영주 등 경북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글=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자문=이두우 포항시 3·1운동연구회 연구위원

▨ 참고=대구독립운동사. 경북독립운동사. 포항의 3·1운동사. 이야기따라 의성여행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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