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북 안동 (상) - 묵계 만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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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01   |  발행일 2019-03-01 제36면   |  수정 2019-03-01
가슴에 담은 것은 바람과 달, 샘과 돌은 벗…‘늦게 얻은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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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의 만휴정. ‘안동 만휴정 원림’은 명승 제82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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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를 가로질러 만휴정으로 들어가는 일각대문. 문 앞에 열녀목이 서있다.

안동 길안면 묵계리 마을 표석 앞에 버스 정류장이 없다. 그러나 어느 날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을 법한 사각의 흔적이 있다. 그 속에 두 개의 의자가 나란히 늙어간다. 아무도 앉을 수 없을 것 같은 이들 앞에, 어쩌면 버스는 매번 멈출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들 만휴(晩休)의 소일거리, 나는 그들 앞에 서서 길을 묻는다. 그들은 그들의 등 뒤로 암막처럼 늘어서 있는 키 큰 수목들의 숲을 가리킨다. 좋은 것은 늘 감춰져 있는 법이지.

마을 늙은 돌담길 지나 돌 많은 계류
바위타고 미끄러지는 송암폭포 위 정자
너른 암반 계곡 통나무로 놓여진 다리
미스터 션샤인 ‘러브 합시다’낭만 장소

고려 개국공신 삼태사의 후예 김계행
문란·폐단 버리고 낙향한 이듬해 건립
‘보물이 있다면 청백만 있을 뿐’쓴 편액


◆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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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리 마을 앞. 의자 뒤편으로 보이는 마을숲 너머 길안천이 흐르고 그 안쪽이 하리다.



숲을 지나면 아름다운 길안천이 환하다. 하리교를 건너면 묵계리의 자연마을인 하리가 조그맣게 나타난다. 마을의 늙은 돌담길을 잠시 걸어 돌 많은 계류를 건넌다. 하얗게 언 계곡물이 작고 맑은 소리를 낸다. 다섯 걸음 만에 산으로 들고 계곡은 순식간에 깊어진다. 물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길의 가장자리는 얼어있다. 한 쌍의 남녀가 내려온다. 미소를 머금어 볼이 불룩하다.

곧 앙상한 가지 사이로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보인다. 송암폭포(松岩瀑布)다. 그 아래 소도 모두 얼음이다. 얼음의 폭포 위에 정자가 앉아 있다. 만휴정(晩休亭)이다. 이 계곡은 임봉산의 북쪽 자락으로 원래 송암동(松巖洞) 계곡이었다. 소나무와 바위가 많은 계곡의 모습 그대로의 이름이었다. 연산군 때인 1500년 초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이 이곳에 만휴정을 짓고는 계곡을 묵계(默溪)라 불렀다 한다. ‘조용한 계곡’이다. 바위를 타고 미끄러지는 물들, 표면은 얼었다. 베일 같은 얼음장 아래서 흐르는 낮은 물소리, 가지에서 가지로 날아다니는 보이지 않는 새들의 높은 울음소리. 이들로 인해 정적은 한결 더 깊어진다.

정자는 계곡 위를 가로지르는 좁고 긴 다리 너머 바위 절벽에 둘러싸여 있다. 다리는 통나무 네 개 정도를 나란히 놓아 야박하지 않은 너비다. 윗면은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다. 계곡 위는 대단히 너른 암반이다. 물줄기는 암반을 타고 내려와 소를 이루고, 다시 다리 아래를 천천히 흘러 몸을 비틀다 폭포로 쏟아진다. 탄탄하면서도 약간은 두려움을 주는 이 다리 위로, 가끔씩 불쑥 떠오를 만한 사랑이야기가 스쳐갔다.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주인공 남녀는 이 다리 위에 마주 섰었다. “합시다 러브, 나랑, 나랑 같이.” 그리고 악수를 나누었다. 그 이전에는 조선 세조 때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공주의 남자’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저 너른 암반에 앉은 수양대군의 딸과 김종서의 아들이 시(詩)를 나누며 사랑을 확인했다. 묵계는 그렇게 한동안 들썩였다.

◆보백당 만휴정 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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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휴정과 쌍청헌 현판. 방문 위에는 ‘지신근신 대인충후’와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편액이 걸려 있다.

김계행은 안동 풍산읍 사람으로 고려 개국공신 삼태사(三太師) 중 한 명인 김선평(金宣平)의 후예다. 세종 29년인 1447년에 진사가 되었고 성균관에 입학해 김종직(金宗直)과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이후 충주향교 교수 등을 지냈고 40대 중반에는 고향집에 머물며 김종직과 우의를 다졌다. 그는 49세에 대과에 급제하고 성종 11년인 1480년 50세의 늦은 나이에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사헌부 감찰을 시작으로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그는 벼슬길에 있으면서 조정이나 왕실의 병폐에 대해서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그 일로 여러 차례 사직과 복직을 반복했다고 전한다. 김종직과의 인연으로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는 태장을 맞고 석방됐고, 70세 되던 해에는 연산군이 다시 지난 사건을 들추어 5개월 동안 옥살이를 겪기도 했다.

만휴정을 지었을 때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옥살이 후 시절의 문란과 폐단을 버리고 낙향한 이듬해다. 다리 끝은 좁고 낮은 일각문이 열려 있다. 석축에 기댄 돌계단이 계곡으로 내려 선다. 옛날에는 돌계단을 통해 오솔길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몸을 굽혀 안으로 들어서면 싸리 빗자루 모양으로 선 열녀목이 하늘을 가리킨다. 왼쪽에 작은 화장실이 있고 오른쪽에 만휴정이 위치한다.

만휴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정면은 계자난간을 두른 누마루로 열려 있고 뒷면 가운데는 대청, 양쪽에는 온돌방을 두어 학문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왼쪽 방문 위에는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 보물유청백(寶物唯淸白)’이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나의 집에 보물은 없다.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이 있을 뿐이다’라는 뜻이다. 그의 호 보백당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계곡의 너럭바위에도 이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방문 위에는 ‘지신근신(持身勤愼) 대인충후(待人忠厚)’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몸가짐을 삼가고 남을 대할 때는 진실하라’는 뜻이다. 이는 김계행이 81세 되던 해 가족과 친척들에게 남긴 말로 이후 후손들이 새긴 것이다.

대청 안에는 쌍청헌(雙淸軒) 현판이 걸려 있다. 쌍청헌은 김계행의 장인인 남상치(南尙致)의 당호다. 남상치는 1453년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폐위되자 이곳 묵계로 낙향하여 쌍청헌을 짓고 은일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쌍청이란 ‘맑은 것 두 가지’로 맑은 바람(淸風)과 밝은 달(明月)을 의미한다고 한다. 김계행은 쌍청헌이 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만휴정이라 했다. ‘늦게 얻은 휴식’이다. 처음에는 초당이었다고 한다.

김계행은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소박하게 치르고 묘비에는 미사여구를 쓰지 못하게 했다. 그 뒤 오랜 세월 동안 만휴정은 거의 폐허가 되었다. 1750년경 보백당의 9세손인 묵은재(默隱齋) 김영(金泳)이 중수를 결심하게 된다. 그는 터만 닦아 놓은 채 둘째 아들 김동도(金東道)에게 만휴정 중수를 완성할 것을 당부하고 세상을 떠났다. 김동도는 1790년 2월 토대를 구축하고, 3월22일 기둥을 세우고, 3월30일 상량하여 마침내 만휴정을 다시 지었다. 기와를 얹은 토석담은 만휴정 툇마루보다 낮다. 밖을 내다보면 묵계의 흰 바위에 새겨진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 보인다. ‘보백당의 만휴정이 자리한 샘가의 돌’이다. 은거의 20여년, 가슴에 담은 것은 바람과 달이었고 만휴의 벗은 샘과 돌이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55번 중앙고속도로 안동방향으로 가다 안동분기점에서 당진영덕고속도로 영덕방향으로 간다. 동안동IC로 나가 35번 국도 청송, 영천방향으로 조금 가면 길안면 묵계리 표석과 만휴정 안내판을 볼 수 있다. 약 200m 전까지 차로 갈 수 있지만 마을회관과 마을숲 앞, 혹은 하리교 근처에 주차하고 걸어가는 것을 추천한다. 10분 내외의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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