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북미정상회담의 역설적 교훈

  • 이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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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26   |  발행일 2019-02-26 제30면   |  수정 2019-02-26
열강에 휘둘렸던 구한말
‘자신 지킬 강한 힘’ 교훈
여태 주변 서성이는 열강
안보, 보수의 전유물 아냐
이시대 중요 진보적 가치
[화요진단] 북미정상회담의 역설적 교훈
이재윤 경북본사 총괄국장

D-1 북미정상회담. 한반도 운명을 가를 또 하나의 분수령이다. 저물어가는 만동(晩冬)에 하노이발 반가운 춘신(春信)이 기다려진다. 남쪽 나라 제비 한마리가 봄 전령사돼 꽃소식 성큼 앞당길지, 백설 속 매화 만개 시샘하는 매서운 삭풍돼 몰아칠지 기대와 우려가 교차된다. 남북한 운명의 방정식을 푸는 키는 미국이 쥐고 있다. 미국의 힘은 여전하다. 전쟁과 평화 사이 어느 것도 선택 가능한 나라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래 근현대사에 끼친 미국의 영향력을 돌아보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역사상 최강 슈퍼강국이 된 미국. 그 압도적 힘이 또다시 한반도 운명과 마주하고 있다.

두 나라 인연은 150년 남짓 거슬러 올라간다. 첫 공식 조우는 제너널셔먼호 사건(1866) 때다. 작은 사건이었지만 조선에 역동적 변화를 불러왔다. 역사의 홀씨와 같았다고 할까. 5년 뒤 신미양요(1871)의 빌미가 됐다. 조미통상조약(1882)의 단초가 된 것도 물론이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두 배경인 신미양요와 미-서(스페인)전쟁. 실상은 드라마의 감동과 사뭇 달랐다. 신미양요 때 미 군함을 몰래 타고 미국으로 도망친 어린 유진초이. 장성해 미-서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 대통령 루스벨트의 “상냥한 말과 거대한 채찍을 들고 조선으로 가라”는 명에 따라 자신을 버린 조국 땅을 다시 밟는다. 인상적 장면이었다. 신미양요는 ‘화성돈(워싱턴)에 사는 해적’쯤으로 여겨졌던 ‘미리견(미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시발점이 됐다. 조정은 조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연미(聯美)정책도 추진했다. 속뜻은 따로 있었다. 열강의 각축장 한반도에서 청·일·러 세력을 견제하는데 미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다. 미국의 반응은 달랐다. 드라마의 또 하나 배경 미-서전쟁(1898)과 연관돼 있다. 대승한 미국은 푸에르토리코, 괌을 얻었고 ‘푼돈’ 주고 필리핀을 샀다. 그게 한반도 비극의 씨앗이 됐다. 전리품 필리핀에 한반도를 끼워 넣은 것이다. 미·일은 빅딜 밀약을 맺었다. 가쓰라태프트조약(1905). 미국은 필리핀, 일본은 한반도를 나눠 챙겼다. 숨 돌릴 틈 없이 을사조약(1905)이 체결됐다. 미국의 방관 속에서다. 미국은 23년 만에 한반도를 떠났다. 외세에 시달리다 지친 조선은 1910년 국권을 상실한다. 일제강점이 시작됐다.

미국이 돌아온 건 광복 전후다. 카이로·얄타·포츠담회담, 모스코바 3상회의. 외세에 의해 또다시 한반도 운명이 흥정됐다. 독립, 신탁통치, 정부수립, 분단이 그랬다. 미국은 회담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주도했다. 당사자인 우리는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구한 말 한반도를 좌지우지한 텐진협정·시모노세키조약·1,2차 영일동맹조약·포츠머스조약·가쓰라태프트조약 그 어디에도 우리 자리가 없었던 것처럼…. 당사자 없이 한반도 운명은 너무나 오랫동안 쉽게, 허술하게 유린됐다. 누굴 탓하랴. 무지와 무능, 무력했던 소치다.

지금은 다르다. 무지하지도, 무능하지도, 무력하지도 않다. GDP 세계 11위, 군사력 7위의 강한 국가다. 군사력만 보면 우리를 쥐고흔든 열강 중 일본을 제치고 프랑스·영국과 나란히 한다. 유사 이래 가장 강하고 부유한 나라다. 5천년 역사에 줄잡아 3천 번의 외침을 견뎌낸 후 이룬 성과다. 경외한다.

그렇지만 구한 말의 교훈을 잊어선 안 된다. ‘자신을 지킬 강한 힘’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열강은 여전히 주변을 서성인다. 남쪽 먼 나라 베트남에서 미·북 정상의 만남에 귀 쫑긋 세우고, 운명의 분수령이라며 초조히 기다리는 게 왠지 불편하다. 회담 성공을 열망하면서도, 미국의 선전을 열렬히 응원하면서도 불현듯 그런 불편함이 일어난다.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고 역설이다. 100년 남짓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운명의 키 한 쪽은 열강이 쥐고 있다. 구한 말 교훈을 현재 시점으로 표현한다면 ‘평화와 번영의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강한 국방력이다’(문재인 대통령)가 되지 않을까. 안보는 보수의 전유물이라지만, 한반도 진보는 국방력이 이 시대 가장 중요한 진보적 가치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재윤 경북본사 총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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