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40] 대구 운림구곡(上)...금호강 물길따라 설정된 구곡…한강 정구 강학하던 사양서당이 중심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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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21 08:12  |  수정 2021-07-06 14:47  |  발행일 2019-02-21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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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정구와 석담 이윤우 등을 기리고 있는 사양서당(칠곡군 지천면 신동서원길 15-10). 운림구곡은 우성규가 한강 정구의 강학처인 사양서당을 중심으로 설정한 구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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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서당 강당건물인 ‘경회당(景晦堂)’ 편액.

대구에도 운림구곡, 농연구곡, 와룡산구곡, 수남구곡 등이 있다. 대구의 구곡에 대해서는 ‘대구의 구곡문화 학술조사 연구단’(연구 책임자 김문기)이 2004년 연구 결과물로 출간한 ‘대구의 구곡문화’(대구시·경북대 퇴계연구소 펴냄)가 있다. 대구의 구곡 중 운림구곡(雲林九曲)에 대해 ‘대구의 구곡문화’ 관련 내용을 토대로 답사 후 정리했다.

운림구곡은 금호강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지점인 사문진교 부근부터 금호강 물길을 따라 대구 북구 사수동의 사양서당(泗陽書堂) 부근까지 16㎞에 걸쳐 설정된 구곡이다. 금호강 하류에 설정된 이 운림구곡의 주인공은 조선 말기 학자이자 문신인 경도재(景陶齋) 우성규(1830~1905)다.

우성규가 이 지역을 구곡으로 설정한 것은 자신이 존경하던 선비인 한강(寒岡) 정구(1543~1620)의 강학처인 사양정사(사양서당)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구는 1617년 칠곡의 사수(泗水)에 사양정사를 짓고 학문을 닦으며 제자를 길렀다. 당시 괴헌(槐軒) 곽재겸(1547~1615), 낙재(樂齋) 서사원(1550~1615), 모당(慕堂) 손처눌(1553~1634), 양직당(養直堂) 도성유(1571~1649), 대암(臺巖) 최동집(1586~1661) 등 대구의 많은 선비가 그의 문하에 몰려들었다.

우성규는 호를 경도재라 지을 정도로 도산의 퇴계 이황을 흠모했다. 월촌(월배)이 고향인 그는 문경 주흘산에 들어가 향산(響山) 이만도(1842~1910) 등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고, 서울로 올라가 명사들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1875년 음서(蔭敍)로 벼슬길로 들어서 선공가감역, 상의원주부, 사직령 등을 역임했다. 그후 현풍현감, 영덕현령, 예안현감 등을 지냈다. 우성규는 1892년 돈령부도정에 임명되었으나 ‘속귀거래사’를 지어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밝히고 귀향했다.

◆우성규가 금호강에 설정한 구곡

우성규가 언제 운림구곡을 설정했는지를 알 수 있는 정확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19세기 말에 설정한 것으로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우성규는 운림구곡을 설정하고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한 ‘용무이도가운부운림구곡(用武夷櫂歌韻賦雲林九曲)’을 지었다.

운림구곡 아홉 굽이는 1곡 용산(龍山), 2곡 어대(魚臺), 3곡 송정(松亭), 4곡 오곡(梧谷), 5곡 강정(江亭), 6곡 연재(淵齋), 7곡 선사(仙), 8곡 봉암(鳳巖), 9곡 사양서당(泗陽書堂)이다. 운림구곡은 그동안 산업화와 도시화로 주변이 많이 훼손되면서 지금은 옛모습을 찾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정구 존경한 조선말 학자 우성규
서당 자리한 운림 신령하게 여겨
사문진교∼서당 부근 16㎞ 걸쳐
무이도가 차운 운림구곡시 읊어
도시개발로 옛모습 찾기 어려워



우성규의 운림구곡시는 서시에 해당하는 총론(總論)과 구곡을 각각 읊은 아홉 수 등 총 10수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이 운림을 보호해 참으로 신령하니(天護雲林異靈)/ 산은 굽이굽이 밝고 물은 맑아라(山明曲曲水澄淸)/ 조각배 타고 창주 길 찾으려고(扁舟欲覓滄洲路)/ 주자의 뱃노래 화답하며 구곡시 지어보네(和櫂歌九曲聲)’

운림은 칠곡 웃갓(上枝)마을의 옛 이름이다. 조선 후기까지 칠곡군 상지면이었는데,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건설되면서 역이 생기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해서 신동(新洞)으로 불리었다. 웃갓은 한강 정구의 제자로 이조참판을 지낸 석담(石潭) 이윤우(1569~1634)가 태어난 곳이고, 마을에는 정구와 이윤우, 송암(松巖) 이원경(1525~1571)을 배향한 사양서당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의 피해를 입어 강당인 경회당(景晦堂)만 남아있다.

사양서당은 1651년 정구가 학업을 닦았던 대구 북구 사수동의 사양정사 터에 향인들이 그를 기려 건립했다. 그 후 1694년 지금의 웃갓마을로 이건하면서 정구를 중심으로 이윤우를 배향하고 이원경의 위패도 함께 모셨다.

우성규가 운림을 신령스럽게 생각한 것은 이곳에 사양서당이 있기 때문이다. 정구와 이윤우의 학덕을 하늘이 보호하기 때문에 그 주변 산은 밝고 물은 맑았다고 노래하고 있다. 창주는 주자가 만년에 거처했던 창주정사를 말한다.

◆1곡은 금호강 낙동강 합쳐지는 용산

1곡 용산은 금호강이 낙동강과 합쳐지는 곳으로, 현재 사문진교가 놓여있다. 주변에 화원동산과 사문진역사공원이 조성돼 있다. 옛날에는 사문진(沙門津) 나루가 있었다. 사문진은 대구에 처음으로 피아노가 들어왔던 곳이기도 하다. 1900년 3월26일 미국 선교사 사이드 보탐(1874~1908) 부부가 낙동강 배편으로 피아노를 실어와 이곳에 들여왔고, 인부 20여명이 소달구지에 싣고 대구 약전골목에 있던 보탐 부부의 숙소로 옮겼다고 한다. 사문진 나루터 주변은 현재 사문진역사공원으로 재탄생해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일곡이라 용암에 조각배 매었다가(一曲龍巖繫葉舟)/ 사공의 손 빌려 긴 강을 거스르네(梢工副手遡長川)/ 나루를 물은 지난 일 찾을 곳 없고(問津往事憑無處)/ 오직 아침 노을 저녁 안개만 보이네(惟見朝霞與暮烟)’

용암이 정확하게 어느 바위인지는 알기 어렵다. 우성규는 사문진 나루에서 배를 타고 유학의 도가 지향하는 바의 근원을 찾아 금호강을 거슬러 오른다. 그는 옛날 공자가 초나라를 향해 가다 길을 잃고 자로에게 나루를 묻게 한 고사를 떠올렸다. 자로가 장주와 걸익이라는 은자를 만나 나루를 물었더니 그들은 세상을 피해 살라고 권했다. 공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세상을 함께 살면서 세상이 잘 다스려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공자의 문진(問津)은 현실적 해결 방도를 찾는 과정이었다. 나루는 문제를 해결하는 단서이자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우성규도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도학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

2곡 어대는 금호강과 진천천(辰泉川)이 합류하는 곳이다. 사문진에서 금호강으로 850m 정도 올라가면 두 물길이 합쳐지는 곳에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있다. 여기가 어대다. 진천천은 대구 산성산 서쪽에서 발원해 화원 부근에서 금호강과 합류한다.

‘이곡이라 배 저어 푸른 봉우리 돌아가니(二曲移船繞碧峰)/ 어대의 꽃과 나무 봄빛을 드러내네(魚臺花木燁春容)/ 흐르는 강물 잠잠해지고 옅은 구름 걷히니(江流浪息微雲捲)/ 돛대 너머 산 빛 푸르디 푸르네(帆外山光翠萬重)’

2곡 어대에서는 1곡에서 안개와 노을로 비유된, 학문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짐을 이야기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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