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사이] 틈과 여백, 침묵

  • 뉴미디어부
  • |
  • 입력 2019-02-18 07:57  |  수정 2019-02-18 07:57  |  발행일 2019-02-18 제18면
[밥상과 책상사이] 틈과 여백, 침묵

#선생님, 얘는 숨기는 게 너무 많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 필요는 없겠지만 큰 줄거리는 엄마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악합니까? 부모는 바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힘든 일이나 부족한 게 있으면 도와 줄 수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 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며칠 동안 밥도 안 먹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말해보라고 하니 엄마는 몰라도 된다며 입을 열지 않습니다. 둘이서 다투다가 선생님을 찾아온 겁니다.

#지금까지 중요한 일은 엄마에게 다 이야기했습니다. 엄마는 내가 다 말해도 항상 무엇인가 더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중학교 때까지는 엄마가 더 말하라고 강요할 때, 간혹 지어내서 이야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엄마 쪽을 바라보며) 엄마, 엄마는 왜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요. 나는 다 이야기했어요. 때론 혼자 고민하며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어요. 혼자 고심해서 결론을 내야 하는 문제까지 다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엄마, 내가 며칠 밥 안 먹은 이유를 지금 말해드릴게요. 학원에서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 여학생을 만나게 됐는데, 난 인사만 하고 지내고 싶은데 자꾸 따로 만나자고 했어요. 내가 공부해야 한다고 했더니 걔가 민망해서 학원을 안 나와요.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어요. 엄마, 이런 것까지 다 말해야 돼요? 엄마는 내게 왜 조금도 틈을 안 주려고 하나요.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틈’이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틈은 둘 사이, 또는 여럿 사이의 빈 공간이면서 여지를 의미한다. 부모 자식도 물리적, 심리적 틈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독립성을 유지한다. 틈은 닫혀 있는 독립된 개체가 서로에게 접근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틈은 중요하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틈이 있어야 자식이 부모에게 종속되지 않고, 부모 또한 자식을 독립된 존재로 분리시킬 수 있다. 나는 엄마에게 틈과 여백을 아이에게 허용해 주라고 당부했다. 학생이 초등학교 동기에게 공부를 하겠다는 뜻을 전한 것도 잘한 판단이라고 칭찬했다. “사랑을 하면 마음이 기쁜 가운데 괴롭고 사랑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안한 가운데 고독하다”는 말도 해 주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열정적인 사랑을 할 기회가 오겠지만 지금은 그런 시기가 아니라는 점도 설명해 주었다. 위대한 창조와 성취는 고독을 즐기면서 일정 기간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몰입할 때 얻을 수 있다.

알베르 카뮈는 “얕은 것은 소리를 내지만, 깊은 것은 침묵을 지킨다”고 말했다. “사람이 속을 털면 털수록 그 사람과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는 침묵 속의 공감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다 털어내 버리면 우리는 더 가난하고 더 고독해집니다.” 독일의 소설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 나오는 구절이다. 틈과 여백, 침묵 속의 공감을 통해 모든 인간관계는 더욱 견고해진다.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시인>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