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교육] 도(道)는 가르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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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18 08:07  |  수정 2019-02-18 08:07  |  발행일 2019-02-18 제17면

‘장자’ ‘대종사(大宗師)’에는 깨달음을 얻은 네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 중 한 사람인 자여(子輿)에게 병이 생겨 자사(子祀)가 병문안을 갔다. 자여는 병이 심각하여 등은 굽어져 불쑥 튀어나오고, 내장은 위에 올라가 붙었으며, 턱은 배꼽에 묻혀 있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고, 상투는 하늘을 가리키고, 음과 양의 기운이 어지러워 죽음이 거의 임박했다. 그럼에도 자여의 마음은 고요하여 아무 일도 없었다.

마음이 고요하여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것은 지금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텅 비었다는 뜻이다. 내가 생각에 끌려 다니며 보고 듣고 말하고 느낄 때, 그것들은 정말로 실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깨닫고 나서 보면 보아도 보이는 것이 없고, 들어도 들리는 것이 없으며, 말해도 말한 것이 없다. 부처가 45년간 8만4천 법문을 설법했지만 한 마디도 설법한 것이 없다는 말과 같다. 이처럼 찾으려는 마음을 놓아버릴 때 본래 아무 일이 없음을 알게 된다. 아무 일도 없음이 곧 도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면서도 자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이 몸뚱아리 하나 간수하느라 고생만 실컷 하다가 끝나는 것이라면 그 뒤에 남는 허탈감은 어찌 감당할까? 자여처럼 깨달은 성인은 삶과 죽음을 둘로 여기지 않는다. 틱낫한 스님은 ‘삶에서 깨어나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생명이 시작되는 그 순간에 집중하십시오. 그것은 또한 당신의 죽음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당신의 삶과 죽음은 동시에 생기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으며, 저것이 없었다면 이것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의 삶과 죽음은 서로 의지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하나가 있기 때문에 다른 하나가 존재합니다. 당신이 삶과 죽음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이 둘은 적이 아니라 한 가지 실체의 두 양상임을 이해하십시오.’

남백자규(南伯子葵)가 여우(女)에게 물었다. “도는 배울 수 있습니까?” 이에 여우는 복량의(卜梁倚)라는 사람에게 도를 가르친 이야기를 한다. 도에 대해 말해 준 뒤 사흘 후에 복량의는 천하를 잊게 되고, 7일이 지나니 사물을 잊었으며, 9일이 지나자 삶을 잊고 확연히 깨달음을 얻어 죽지도 태어나지도 않는 경지에 들었다는 것이다. 확연한 깨달음을 장자는 ‘조철(朝徹)’이라고 불렀다. 마치 아침 해가 환히 비추듯이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여우가 복량의를 가르친 방법을 장자는 ‘그것을 잘 지켜 말없이 일러주었다(猶守而告之)’라고 하였다. 도를 자기 몸에 지니고 잘 지키는 것, 그것이 가르침의 최상의 방법이고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다. 머리로 도를 이해하여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도를 얻을 수 없다. 생각, 느낌, 문자에서 도를 구하는 자는 결코 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무언가를 얻으려는 마음을 가지고는 도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승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을 하려는 욕구에서 제자를 건져내는 일이다. 물론 이 일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하지만 결국 도의 문 입구까지 끌고 갈 수 있는 것은 스승의 말이다. 도의 문은 좁은 문이다. 사람들이 즐겨 다니지 않는 문이기 때문이다. 좁은 문은 제자가 직접 들어가야 한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이 문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아야 들어갈 수 있다. 그 문에 들어서면 비로소 삶과 죽음이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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