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시선] 한복이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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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14   |  발행일 2019-02-14 제30면   |  수정 2019-02-14
시원하게 여름철 보내라며
시집 가는 딸에 살창고쟁이
평생 입어도 못입을 정도로
많은 한복 건넨 친정어머니
예전 여성들의 삶 만나보길…
[목요시선] 한복이 있는 풍경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살창고쟁이’라는 옷이 있다. 주로 경북 북부지역 여성들이 속옷으로 입었던 여름철 홑바지를 말한다. 살창고쟁이는 삼베나 모시로 만드는데 남자 한복바지와 비슷한 모양새이지만 허리둘레를 따라 손바닥보다 기다란 직사각형 구멍을 군데군데 파내어 구멍이 숭덩숭덩 뚫린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 모양이 마치 문(門) 살창을 닮았다고 해서 살창고쟁이라고 한다. 지금이야 여름철 여성들의 맨발, 맨다리가 흉이 되지 않지만 예전 반가에서는 여성들이 여름에도 겹버선을 신어야 했고 치마저고리 아래 여러 겹의 속옷을 갖춰 입어야 했다. 특히 치마 밑으로는 속치마에 속바지, 속곳, 속고쟁이까지 속옷만 해도 몇 벌이다. 겨울이라면 방한이라도 되겠지만 여름마저 이렇게 지내는 것은 여성에게 대단한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예전 신부들의 혼수에는 이 살창고쟁이가 한두 개 이상 꼭 들어 있었다고 한다. 시집가는 딸이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여름을 나길 바라는 친정어머니의 마음과 함께, 한편으로는 뚫린 구멍으로 새댁의 흉도 같이 새어나가 시집살이가 수월해진다는 속설 때문이기도 하다.

10년 전쯤 사진으로만 봤던 살창고쟁이를 박물관에서 직접 본 적이 있다. 그 살창고쟁이는 심지어 엉덩이 뒤쪽이 박음질이 되어 있지 않아 앉으면 뒤가 트여지도록 되어 있었다. 여성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실용적이고 창의적인 디자인이었다. 살창고쟁이는 바람이 숭숭 통하는 세상 시원한 옷이기도 하지만 딸을 위하는 친정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옷이기도 한 것이다. 살창고쟁이 한 벌에서 엄격한 시집살이를 견뎌야 할 딸에 대한 친정어머니의 염려, 신산하고 고생스러웠을 여성들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느껴져 그 애틋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속상함에 감정이 복잡했던 기억이 있다.

얼마전 그 복잡한 감정을 또 한 번 느낀 전시회가 있었다. 지난 연말부터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여성 한복, 근대를 만나다’전이다. 190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여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입었던 한복과 한복에 담겨 있는 대구여성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하는 기획특별전이다. 주말에 1937년생 어머니와 함께 둘러 본 전시는 말 그대로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일생 그리고 내 유년시절을 전격적으로 소환해내는, 시간의 먼지를 덮어쓴 ‘기억서랍’ 속 추억의 재현이었다. 전체 3부로 구성된 전시는 1부에서 시기별 한복의 변천을 다양한 옷감과 저고리형태, 소품 등을 통해 보여주었는데 딸의 혼수 한복을 직접 장만하는 장면을 재현한 ‘엄마의 공방’은 어머니가 가장 즐거워했던 테마였다. 2부에서는 ‘대구 녀성 극장’이란 주제를 통해 국채보상운동, 3·1만세운동, 6·25전쟁 등 근대기 대구의 역사적 장면마다 주역으로 등장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극화해 보여주고 있다. 특히 대구여성가족재단이 협력기관으로 스토리와 콘텐츠를 제공해 더욱 뜻 깊었던 테마였다. 3부에서는 고(故) 이영희 디자이너의 한복 웨딩드레스도 특별했고 시민들이 제공한 한복사진도 인상적이었지만 내 발걸음을 한참이나 붙잡았던 것은 권분순 여사(1940~2016)의 한복이었다. 권분순 여사는 결혼할 때 친정어머니가 두루마기를 40여벌이나 지어줄 정도로 한복을 많이 장만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 후 집안일과 농사일에 바빠 특별한 날에만 한복을 입다보니 생전 한 번도 입지 못했던 혼수 한복들을 유품으로 남겼고, 이번 전시를 위해 딸이 이 옷들을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살창고쟁이를 봤을 때처럼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올라왔다. 평생을 입고도 못 입을 만큼 많은 옷을 지어 보내면서 친정어머니는 무엇을 기원했을까? 입지도 못한 어머니의 정성 깃든 한복을 꺼내보면서 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근대기를 관통하는 여성들의 일생이 한복을 걸치고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가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단순한 의복으로서의 한복이 아니라 격동기 여성의 일생이 담긴, 사연이 있는 특별한 전시를 만나고 온 것이다. 햇살 좋은 날, 어머니 손잡고 박물관으로 추억나들이 다녀오길 추천한다.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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