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그 중심에 선 대구·경북인 .3] 3월8일 서문시장, 그날의 첫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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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운기자 박관영기자
  • 2019-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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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 지고 대야 이고…日 감시 피해 모여든 1천여명 ‘1㎞ 만세행렬’

대구 중구 동산동 청라언덕의 90계단은 ‘3·1만세운동길’이라 부른다. 1919년 3월8일 일경의 감시가 삼엄한 가운데 계성학교·신명여학교 학생들은 이 길을 통해 몰래 숨어 서문시장까지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의 감시는 갈수록 삼엄했지만 대구의 만세운동은 차질없이 준비됐다. 마침내 1919년 3월8일 토요일, 서문시장에서 첫 대한독립 만세 함성이 울렸다.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 남산정교회(현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를 비롯한 기독교계 인사와 시민·교사·학생이 중심이 된 ‘거사’였다. 이날 만세운동은 모두 1천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한민족의 정당한 뜻을 세상에 공포했다. 특히 서문시장에서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부근)까지 평화시위 행진을 벌이며 일제의 부당함에 저항했다. 하지만 총칼로 무장한 일군경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강제해산됐고 157명이 구속됐다. ‘3·8만세운동’은 이후 대구는 물론 경북지역으로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는 불씨가 됐다.

#1. “대한독립 만세” 서문시장에서의 첫 함성

대구 만세운동에 참여한 신명여학교 학생들의 ‘3·1운동 정신’을 계승하자는 뜻에서 세워진 ‘신명 3·1운동 기념탑’. 신명여학교는 대구 만세운동 당시 교사와 재학생은 물론 졸업생까지 참여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1919년 3월8일, 비가 그치고 날이 밝았다. 습기가 걷히자 햇빛의 숨결은 순하고 맑았다. 빛은 깊숙이 내려앉아 대지 위에서 부풀어 올랐다. 장날을 맞은 서문시장은 시끌벅적했다. 장꾼들의 흥정소리는 빛을 타고 올라 장터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이날 서문시장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한 이만집과 김태련 등 기독교측 인사들은 장꾼들 사이에 끼어 때를 기다렸다.


거사시간되자 김태련이 독립선언문 외쳐
이만집의 ‘만세’ 선창에 시민·학생 화답
서문시장서 출발한 시위대 동산교 향해
日기마경찰의 말 찌르면서 앞으로 전진
농민·머슴·기생까지 합세하자 軍警 진압
157명 구속…시위 앞장선 인사들은 중형



토요일을 맞아 수업을 일찍 마친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삼삼오오 교문을 빠져나왔다. 학교를 나선 학생들은 지금의 동산 청라언덕 90계단(3·1운동길)을 지나 거사 장소인 서문시장으로 향했다. 일경의 감시는 고삐를 더 죄었고 곳곳에서 서슬퍼런 눈이 날을 세웠다. 학생들은 감시를 피하기 위해 교복 대신 지게를 지거나 상인처럼 옷을 갈아입고 변장한 채 시장으로 모여들었다.

신명여학교 교사와 학생들도 수업을 마치자마자 동산 청라언덕을 거쳐 서문시장으로 향했다. 이들 역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대야에 수건을 담아 빨래를 하러 가는 것처럼 꾸며 학교를 벗어났다. 교문 밖 개천에 이르렀을 때 학생들은 대야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시장으로 뛰었다. 성경학교 학생들도 박장호 교사의 인솔로 모여들었다. 거사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오후 2시가 넘도록 대구고보 학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초조한 시간은 계속됐다.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다행히 약속한 시간인 오후 3시가 다가오자 200여명의 대구고보 학생들이 교복 차림으로 모여들었다. 일경과 교사들의 저지를 뚫고 오느라 늦었다는 설명을 그제서야 들을 수 있었다. 일부 문헌에 따르면 대구농림학교 학생들도 만세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나서다 교문에서 저지당한 후 기숙사에 감금돼 합류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꾼들로 북적이던 서문시장은 한순간 술렁이기 시작했다. 시민과 학생 등 1천여명은 서문시장 입구 강씨네 소금가게 앞(옛 동산파출소 부근. 지금은 3·1독립운동 발상지 표지석이 서있다)으로 모여들었다. 일경도 현장에서 그 모습을 예의주시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였다. 군중 속에 섞여있던 김태련 조사가 쌀가마니로 급조한 단상에 올랐다. 그리고 품 속에서 독립선언문을 꺼냈다. 다급해진 일경이 급히 그를 제지했다. 결국 김태련은 독립선언문 전체를 낭독하지 못하고 공약 3장만 크게 외쳤다.

1. 오늘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한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1.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뜻을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1. 모든 행동은 무엇보다도 질서를 존중하며,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김태련의 외침은 당당했다. 한민족의 정당한 뜻을 세상에 공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억압과 탄압에 숨죽여야 했던 순수한 민중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이만집 목사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시민과 학생들은 화답하듯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함성은 뜨거웠고, 한을 토해내는 통곡소리처럼 절절했다. 손에 든 태극기가 하늘로 솟구칠 때 만세소리는 더욱 크게 울려퍼졌고, 산맥처럼 출렁거리며 끊임없이 이어졌다.

#2. 서문시장에서 달성군청까지…뜨겁고 평화로운 만세행렬

시민과 학생들은 곧바로 거리 시위행진에 나섰다. 선교사의 일을 돌보던 농민 안경수가 큰 태극기를 장대에 매달아 앞장섰다. 그 뒤를 1천여명의 군중이 뒤따랐다. 선두에는 이만집, 김태련, 김영서, 최경학, 이태학, 박제원이 나섰다. 신명여학교 교사 임봉선은 머리에 수건을 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모교 학생들을 이끌었다. 1㎞가 넘는 행렬은 사뭇 장엄했다. 전장으로 나아가는 병사들처럼 위엄 있고 엄숙해 보였다.

서문시장 입구 강씨네 소금가게 앞을 출발한 시민과 학생들은 동산교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만세소리는 더욱 커졌다. 평화롭고 뜨거운 행렬이었다. 손에 든 태극기는 무리지어 나부끼었고 행렬은 대열을 이루어 거대한 물결처럼 출렁이었다. 하지만 동산교를 지나려하자 일본 기마경찰이 앞을 가로 막았다. 말을 탄 일경은 완강했다. 시위 행렬은 잠시 주춤했다. 이때 선두에 선 안경수가 태극기를 꽂은 깃대로 기마경찰이 탄 말의 엉덩이를 찔렀다. 놀란 말은 뒷걸음치다 달아났다. 행렬은 그 사이를 다시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고 동산교를 지나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로 향했다. 햇빛은 여전히 깊었고 만세 소리는 빛을 타고 부풀어 올라 거대한 함성이 되었다.

대구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또다시 위기감이 감돌았다. 경찰서 옥상에는 기관총이 시위대를 겨누고 있었다. 시야에 들어온 총구는 섬뜩했다. 살기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누구 하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동요하지도 않았다. 일경은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행렬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기관총을 발포하지 않았다. 섣불리 발포했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치달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세행렬은 대구경찰서에서 다시 만경관 방면으로 방향을 틀어 경정통(京町通, 현 종로)으로 들어섰다. 종로에 들어섰을 때 계성학교를 다니다 가난 때문에 중퇴한 뒤 양화방에서 직공으로 일하던 강학봉이 제화공들을 이끌고 합세했다. 사기는 한층 달아올랐고 만세소리는 더욱 커졌다. 종로를 빠져나온 행렬은 약전골목 대남한의원 네거리를 거쳐 중앙치안센터(중앙파출소)를 지나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부근)에 이르렀다. 지게꾼, 농민, 양복사·잡화상·구둣방·약방 주인, 머슴, 기생까지 합세해 시위대는 크게 불어나 있었다.

하지만 달성군청 앞은 음산했다. 기마경찰과 총칼로 무장한 대구헌병대 소속의 헌병, 그리고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80연대 소속의 일본 군인이 가로막고 있었다. 5~6대의 기관총과 착검까지 한 군경은 닥치는 대로 삼킬 기세였다. 만세행렬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가로막힌 길에서 독립만세 함성은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일군경의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됐다. 여학생들의 머리채를 잡아채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여린 몸은 중심을 잃고 바닥에 꼬꾸라졌다. 일군경은 쓰러진 학생들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학생들을 이끌던 교사 임봉선은 온 몸이 피범벅이 된 채 쓰러졌다. 진압은 거세고 사나웠으며 쏟아져 내리는 급류처럼 급박했다. 곳곳에서 울음 섞인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명 속에서도 만세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김태련 조사 역시 심한 구타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 김용해가 격하게 항의하자 일군경은 그를 하수도랑에 처넣고 짓밟았다. 결국 김용해는 정신을 잃고 실신한 채 끌려가 형무소로 이송됐다. 이후 20일 만에 가출옥(3월27일)했지만, 이틀 만에(3월29일) 숨지고 말았다.

#3. 대규모 구속과 중형, 하지만…

1919년 3월8일, 평화롭고 뜨거웠던 대구의 첫 만세운동은 결국 일군경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강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광복회 대구시지부가 발행한 대구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이날 만세운동으로 모두 157명이 구속됐다. 이 중 67명은 대구지방법원에서 4월18일 재판을 받았다. 이만집, 김태련, 정재순, 백남채, 최경학, 최상원, 권의윤, 이재인, 임봉선, 김무생, 박제원, 이태학 등 시위에 앞장선 이들과 계성학교 30여 명(당시 전체 학생수는 46명), 대구고보 5명, 성경학교 강습생 4명도 포함됐다. 붙잡히지 않은 최상원 등 12명은 궐석재판을 받았다.

재판을 받은 67명 가운데 이성해와 장봉수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65명은 징역 6월에서 3년의 실형을 받았다. 65명 중 15명은 공소(법원의 1심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복, 다시 판결을 받는 것으로 항소와 같다)를 포기했고, 40명은 공소를 제기해 5월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정광순은 무죄로, 신현욱 등 19명은 집행유예 2년을, 나머지 40명은 6월에서 3년형을 받았다. 특히 이만집, 김영서, 김태련, 백남채, 김무생, 정재순, 최상원, 박제원, 이태학, 최경학, 권의윤 등은 1년6월~3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3·8대구 만세운동으로 수많은 시민과 교사·학생이 구속됐지만, 그들의 신념과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날의 뜨거운 함성은 여진처럼 남아 다음을 기약하고 있었다. 불꽃을 들불로 일으킬 거대한 여진이었다.

글=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대구독립운동사. 경북독립운동사. 권녕배의 논문 ‘대구지역 3,1 운동의 전개와 주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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