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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음악 창의도시 대구 .8] 戰後 대구의 대중음악(中)-록밴드와 인디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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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관영기자
  • 20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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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밴드 ‘마이스’ 캠퍼스보컬 ‘새비지’…60년대 대구 록·재즈의 시작

모던록밴드 매드킨(MADKEEN)과 외국인 인디밴드 스타킬러(STRKLLR), 밴드 조밴이 대구시 남구 대명동 클럽 헤비(HEAVY)에서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1996년 문을 연 클럽 헤비는 한국 유명 인디밴드의 순례지로 이름나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
대구지역에서 발행된 음악전문 독립매체. 1990년대를 전후해 음악 다양성이 확대되면서 대구에서도 다양한 독립문화 관련 매체들이 생겨났다.
1950년대는 로큰롤의 시대다. 미국에서 시작된 이 변화의 바람은 모든 종류의 금지로부터의 해방, 젊음과 아름다움, 낭만, 반항과 자유의 함성으로 서구 사회를 휩쓸었다. 그러나 50년대 말 미국에서는 다시 청교도주의가 젊은이들을 억압했고 로큰롤은 제도권에 의해 파국을 맞게 된다. 이때 로큰롤은 영국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1963년 영국에서는 비틀스가 제1집을 발매하고 미국에서는 케네디가 암살당한다. 1964년 2월, 비틀스가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다. 그들이 들고 온 ‘아이 워너 홀드 유어 핸드(I wanna hold your hand)’가 미국 음악시장을 장악한다. 비틀스 열풍이 유럽 전역과 미국을 강타했고 젊은 예술가들은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바람은 미8군과 AFKN을 통해 한국에 상륙했다.

#1. 록의 등장

로큰롤이 등장하면서 미8군 무대는 재즈나 댄스음악을 연주하는 대편성의 악단인 ‘빅밴드’에서, 일렉트릭 기타가 중심에 서는 소규모의 ‘캄보밴드’로 변화한다. 미8군에서 활동을 하던 연주자들은 앞다투어 록음악에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때 소위 일렉트릭기타 3인방으로 불리던 이인표, 김희갑, 신중현이 등장한다. 이인표는 한국 최초로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했다고 전해진다. 훗날 가요계의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낸 김희갑은 대구에서 성장해 고등학생 때 이미 공군 클럽에서 기타 연주를 했다. 한국 록음악계의 대부 신중현은 당시 재키라는 애칭으로 활동했다. 이후 1963년 신중현이 ‘애드포(Add 4)’를 결성하고 1964년 김홍탁, 윤항기가 ‘키보이스’를 이끌면서 한국 록밴드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즈음 대구에서도 막강한 캄보밴드가 탄생한다. 북구 팔달교 근처에 있었던 성신고아원 출신 10명으로 구성된 ‘마이스(Mice)’다. 그들은 1급 악단의 대우를 받으며 전국에 산재한 미8군 클럽을 순회했고 1966년 12월1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제1회 전국재즈페스티벌에 출전해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1965년에는 청구대(영남대) 캠퍼스밴드 ‘새비지(Savage)’가 등장했다. 대구에서는 처음으로 전자기타를 앞세운 4인조 보컬 밴드로 이들이 대구 록밴드의 효시가 된다. 이 무렵 대구에도 비틀스 붐이 인다. 청년문화가 힘을 받고 방송가와 음악다방, 유흥가의 클럽 무대가 활성화되는 한편 1966년부터는 베트남전 파병이 본격화되고 한반도에 주둔하던 미군의 수가 줄어들면서 미8군 쇼 시장은 축소되었다. 60년대 후반 록과 포크는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청년 문화를 주도해 나갔다. 전국에서 기타 배우기 붐이 일었고 기타리스트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2. 스쿨밴드의 활약

1970년대 서구 대중음악에 있어서 청년정신과 저항의 코드로 표현되던 록음악이 한국 대중음악의 언어로 수용된다. 싱어를 동반한 4·5인조 전통 보컬 밴드가 쏟아졌고 밴드 없는 학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70년대 초 대구 보컬밴드의 신지평을 열었던 사람은 드럼 주자 장국현, 김무근, 김태수, 베이스 주자 조용길·김국환·김성환·오르간 주자 박문희, 리더 기타 파트의 전재석, 싱어 이재호 등이 있었다. 미군부대 앞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한 밴드 중에는 ‘크로스 본즈(Cross bonds)’가 유명했다. 특히 경북예고 출신 최영희의 기타 연주 실력은 ‘대구의 신중현’이란 닉네임이 붙을 정도로 압권이었다.


록, 70년대 청년정신·저항코드 인식
미군부대앞 활동 ‘크로스본즈’ 유명
경북예고 출신 기타 연주자 최영희
‘대구의 신중현’으로 불릴만큼 압권
70년대 중반이후 캠퍼스 밴드 활발
‘국풍 81’등 각종 대회 참가 이름 알려

80년대초 라디오 통해 세계 음악 소개
다양한 음악에 골수 마니아층도 형성

대구에도 90년대부터 인디클럽 생겨
쟁이·모리슨·락왕·스쿨·올드팝스 등
‘헤비’는 지금도 한국 인디밴드 순례지
록밴드 ‘아프리카’ 21년째 활발한 활동



1975년 지역 첫 의대 캠퍼스밴드가 결성되었다. 경북대 의대생으로 구성된 ‘메디컬 사운드(Medical sound)’다. 밴드활동은 본과에 올라가면서 중단되었지만 악기는 후배들이 물려받았고 이후 30년 동안 150여명의 멤버를 배출했다. 1976년에는 영남대의 ‘에코스(ECHOS)’, 경북대 공대의 ‘일렉스(ELECS)’ 등이 탄생했다. 특히 ‘에코스’의 실력은 그룹 ‘해바라기’의 리더 이정선이 스카우트를 제의할 만큼 뛰어났다. 에코스 4기는 캠퍼스 밴드로서는 처음으로 1981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국풍 81’에 참가해 ‘사랑이란’ 곡으로 2등을 차지했다. 록 밴드 불독맨션의 보컬 이한철과 걸스데이 소진도 에코스 출신이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 사회는 암흑기였다. 권위주의적 정치질서 속에서 오히려 다양한 문화현상이 늘어났다. 대중음악도 트로트, 포크, 록, 발라드, 민중가요, 댄스음악 등 여러 장르가 공존했고 TV와 라디오가 큰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대중음악의 상업화를 추구했다. 포크와 록 음악은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더 빛을 발했다. 그들은 영향력이 큰 방송매체를 기피하고 의미 있는 노랫말을 추구했다. 즉 록과 포크를 중심으로 한 언더그라운드 음악과 대중매체를 위주로 활동하던 주류 음악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록밴드들은 소극장 라이브 콘서트를 통해 실력 있는 가수로 평가받았고 새로운 감성의 한국적인 록을 탄생시켰다. 그룹 백두산의 리더 기타리스트 김도균은 경북고를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갔고, 영신고 밴드 출신의 김형철은 신촌블루스에 가세했다.

#3. 마니아의 성장과 인디 돌풍

1990년대 초중반 대한민국 음악은 대격변기를 맞는다. 이미 1980년대 초부터 라디오 심야 프로그램 등을 통해 전 세계의 각종 음악이 유입되었다. 특히 성시완이 아트록과 프로그레시브록을 보급하고, 전영혁이 제3세계 음악을 소개하면서 음악을 듣는 귀가 다양해지고 골수 마니아층이 두껍게 형성되고 있었다. 여기에 1990년 배철수의 ‘음악캠프’까지 가세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계는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2집 앨범부터 세분화된 장르 개념이 등장했다. 1994년에는 인디음악이 출발한다. 인디음악은 ‘인디펜던트 뮤직(Independent Music)’의 줄임말로 상업적인 거대자본과 유통 시스템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음악이다. 초기 인디 신(scene)의 흐름은 펑크 밴드들이 주도했지만 이후 인디음악은 일종의 문화 운동으로 번진다.

지역의 인디 문화는 우후죽순 팔색조처럼 돋아났다. 국내외 음악에 대한 더 깊은 정보를 원하는 음악 팬도 늘어났다. 제도권이 흡수하지 못한 다양한 독립문화에 대한 매체도 생겨났다. 그중 1990년 11월 대구에서 발간된 프로그레시브록 전문 무크지 ‘우띠(UT)’가 있다. 음악 모임으로 출발한 우띠는 12권의 책자를 발간한 뒤 1993년 이카루스(ICARUS)로 개명했다. 그들은 정기음악 감상회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의 프로모션 및 클럽 콘서트를 주최하면서 3권(통권15호)의 책자를 발간하고 사라졌다가 1996년 4월 우띠와 이카루스를 보며 자란 마니아들에 의해 부활했다. 1998년 2월 통권22호부터 ‘구멍(HOLE)’으로 제호가 바뀌었고 2002년 통권32호 이후 잠정 중단, 2005년 12월 통권33호를 끝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지역 인디클럽의 출발도 1990년대 초였다. 1992년경 미술을 전공한 문화 게릴라 최재정이 복합 문화 공간 ‘쟁이’를 열었다. 이 밖에 클럽 ‘모리슨’, 신은숙의 ‘헤비(Heavy)’, 김명환의 ‘소리공간’ ‘라이브 인디’ ‘레드제플린’ ‘락왕’ ‘얼반(URBAN)’ ‘DMG(대구음악창고)’, 이동우의 ‘가락스튜디오’, 2000년 김형철이 서울의 모든 기반을 버리고 내려와 오픈한 ‘스쿨(School)’, 보컬 밴드 재결성 붐을 일으킨 ‘올드 팝스(Old pops)’ ‘블루노트’ ‘소다(구 OB 캠프)’ 등 수많은 공간이 인디 음악인들의 대들보 역할을 했다. 1996년에 문을 연 헤비(HEAVY)는 지금도 한국 유명 인디밴드의 순례지다.

대구 인디음악계의 큰형님은 올해로 결성 21주년이 되는 록밴드 ‘아프리카’와 대구 블루스의 자존심 이대희라 할 수 있다. 이외에 사필성밴드, 조진영, 도노반, 임정득, 극렬파괴기구, 초콜릿팩토리, 전복들, 카노, 당기시오, 라이브 오 레미디, 헤이맨, 더 튜나스,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 지포잇, 영과제, 범화지구, 유니커즈, 슬로쉽, 락키즈, 에스텔, 오무희, 손혜준, 오리너구리, 3분의1초, 유쓰위쓰, 몽쉐리, 와썹, 녹슨드럼통, 홀리마운틴, 쓰리쿠션, 김빛옥민, 이글루, 폴립, 오늘도 무사히, 권나무, 제8극장 등 헤아릴 수 없고 장르 또한 다양하다. ‘인디053’이라는 특이한 집단도 있다. 전방위독립문화예술단체를 표방하는 그들은 록밴드 활동, 음반제작, 공연기획 등 대구 인디 문화의 오른손으로 활동한다.

대구 인디 음악인들은 해산, 이합집산, 재결성, 새로운 탄생 등 많은 과정을 겪었다. 비록 음악으로 밥 먹고 살기에 여전히 녹록지 않지만 1990년대 이후 오늘까지 음악 애호가에게는 꿈과 같은 시대였다. 지금도 많은 음악인들이 활동하며 각종 페스티벌과 콘서트가 존재한다. 음악을 하는 이가 있고, 듣는 이가 있고, 그들을 위해 모의하는 이가 있고 공간이 있다. 대구 인디문화에는 뜨거운 록의 피가 흐른다. 대구가 음악창의도시 네트워크에 가입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한국 전통음악에서부터 오케스트라, 재즈, 포크, 힙합, 가요 등 다양한 음악장르가 골고루 발달한 도시라는 점이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김형찬, 한국대중음악사 산책, 알마, 2015. 장유정, 한국 대중음악사 개론, 성안당, 2015. 알랭 디스테르, 록의 시대, 시공사, 1997. 영남일보, INDIE “상업자본에 의해 공장서 찍어낸 듯한 음악은 안 한다, 왜 우린 뮤지션이니까”, 2013. 영남일보, 대구 추억 기행, 2003~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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