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오스트리아 빈의 카페

  •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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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1-25   |  발행일 2019-01-25 제37면   |  수정 2019-01-25
모차르트·프로이트의 ‘단골카페’ 예술가·지식인들의 아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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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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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첸트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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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자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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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른터너 거리의 국립오페라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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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첸트랄 내부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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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소형 펜스터 카페의 스페셜 메뉴인 와플콘 마키야토.

영어권에서 비엔나(Vienna)로 부르는 빈(Wien)은 BC 500년경에 켈트족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도시다. 1440년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가 들어서면서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신성 로마제국의 수도 역할을 했다. 1805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신탁통치를 받다가 1954년 독립하면서 다시 수도가 되었다. 이 도시는 멋진 고딕양식의 슈테판 성당을 비롯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 쇤부른 궁전, 사보이 왕가의 벨베데르 궁전 등 유적이 즐비한 역사도시다.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과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의 도시, 하이든·모차르트·슈베르트·리스트·요한 슈트라우스·베토벤·브람스 등으로 기억되는 음악의 도시, 왈츠와 요들의 도시, 프로이트의 도시,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도시이기도 하다. 또 누군가에게는 영화 ‘제3의 사나이’로 기억되는 스파이의 도시며, ‘비포 선라이즈’로 기억되는 하룻밤 풋사랑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에게 빈은 비엔나 커피로 기억되는 도시다. 비엔나 커피는 1980년대 대학시절 동성로 늘봄이나 가배 같은 커피숍에서 여학생과 만날 때 폼 잡으며 주문했던 비싼 커피였다. 그 오리지널 비엔나 커피를 마실 요량으로 빈의 카페를 찾았다. 그런데 정작 비엔나에는 비엔나 커피가 없었다. 달달한 휘핑크림을 얹은 아인슈페너가 내가 알고 있던 비엔나 커피였다. 대신 빈의 문화를 흠뻑 마셨다. “빈은 카페에 둘러싸인 도시”라는 브레히트의 말처럼 빈에는 카페가 많고 또 카페의 문화와 전통이 살아있었다. 그래서 빈의 카페하우스가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누구나 찾는 평등·공화주의 상징공간
문학·예술·철학·스캔들 퍼져나간 곳
귀족들의 폐쇄적인 살롱문화와 차이

음악가들에 의해 뿌리내린 카페문화
국립오페라극장 맞은편 카페 모차르트
모차르트가 결혼식 올린 슈테판 성당

당대 지식인과 예술가들 만남의 장소
거리곳곳 산재 역사유적 사이 존재감

도시 카페 최고의 상징 ‘카페 첸트랄’
작가·심리학자·히틀러도 즐겨 찾아
250개 신문철 비치 응접실 겸 도서관
입구에는 괴짜 시인 알텐베르크 동상


카페 ‘플로르’나 ‘마고’에 있으면 파리와 파리지엔이 보이고, 카페 ‘플로리안’에 들어서면 베네치아와 베네치아 사람들이 보이는 것처럼, 빈에서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문화를 향유하고 소비한다는 뜻이란다. 이 도시의 저명한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어제의 세계’라는 회고록에서 “빈의 카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비슷한 것이 없는 비교하기 힘든 매우 특별한 종류의 기관”이라고 했다. 그래서 작정하고 하루를 빈의 카페만 쏘다니기로 하였다.

세계 최초의 카페로 알려진 곳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1475년 개점한 ‘키바 한(Kiva Han)’이다. 그 후 중동의 종교와 문화 중심지였던 메카를 시작으로 1530년대 이후 다마스쿠스와 카이로 같은 중동의 여러 도시로 퍼져나갔다. 이러한 카페문화가 유럽에 전래된 것은 17세기경이다. 기독교 문화 아래의 유럽인들은 커피를 이교도들의 음료로 여기며 ‘이슬람교도의 와인’이라고 불렀다. 이 낯선 음료는 이탈리아 무역상들에 의해 차츰 전파되기 시작하여 1629년 베네치아에 유럽 최초의 카페가 생겨났다. 이어서 런던에는 1650년, 파리에는 1672년 첫 카페가 생겨났다. 귀족들의 폐쇄적인 살롱문화와 달리, 누구나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카페는 평등과 공화주의를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렇게 유럽의 카페는 문학과 예술이 탄생하고, 철학과 자연과학이 논의되었으며, 패션과 스캔들이 퍼져나갔고, 정치와 혁명이 싹튼 장소가 되었다.

빈에 처음 커피가 들어온 것은 1683년 폴란드계 군인이었던 콜시츠키에 의해서였다. 그 해 빈 전투에서 터키 군대가 버리고 간 커피콩을 유통시킨 것이었다. 아랍문화에 익숙한 콜시츠키는 ‘푸른 병 아래의 집(Hof zur Blauen Flasche)’이라는 빈 최초의 카페를 열었다. 커피 가루를 걸러내고 우유를 더하는 빈 특유의 방식도 이때 생겨났다. 그의 이름을 딴 빈 남쪽의 콜시츠키 거리(Kolschitzky-gasse)에는 아랍 복장을 하고 커피를 따르는 그의 조각상이 있다.

영국의 카페가 학술과 사상을 키워냈고, 파리의 카페가 혁명을 잉태했다면, 빈의 카페는 문학과 예술을 피워내었다. 특히 음악의 도시답게 빈의 카페 문화는 음악가들에 의해 뿌리내렸다. 커피 애호가였던 바흐는 1732년 ‘커피 칸타타’를 작곡했는데, 이 무렵이 본격적으로 카페 문화가 확산되던 시기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1794년에 문을 연 카페 모차르트(Cafe Mozart)였다. 이 카페는 총 23구(區)로 나누어진 빈의 행정구역 가운데 가장 중심인 제1구 이네레슈타트에 있다. 이 구역은 슈테판 성당을 중심으로 중세 이래의 옛 유적이 몰려 있을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행정, 금융, 상업의 중심지다. 특히 슈테판 성당에서 국립오페라극장으로 빠져나가는 케른트너 거리가 최고의 번화가인데, 카페 모차르트는 국립오페라극장 맞은편에 있다.

처음에 카페를 드나들던 이들은 시인과 작가, 음악가와 연극배우, 그리고 극장 관객이었다. 유럽 도시의 중심 광장에는 대개 오페라극장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극장 주변에는 으레 카페 모차르트처럼 역사를 자랑하는 카페가 있다. 이 카페는 모차르트를 비롯하여 베토벤, 슈베르트 등 숱한 음악가들의 단골 카페였다. 영국의 스릴러 작가 그래엄 그린이 영화 ‘제3의 사나이’ 시나리오를 썼던 장소이며 영화에도 등장한다.

카페 모차르트도 그렇지만 케른트너 거리에는 모차르트의 흔적이 많다. 슈테판 성당은 모차르트가 결혼식을 올렸던 곳이며, 근처의 슈테플 백화점은 1791년 모차르트가 숨을 거둔 곳이다. 이 백화점 건너편 골목에는 모차르트에 눌려 늘 2인자로 살았던 안토니오 살리에르가 살던 집도 있다. 카페 모차르트가 음악가들의 카페였다면 슈테플 백화점 뒤에 자리 잡은 카페 프라우엔후버(Frauenhuber)는 화가와 문인들의 카페였다. 1788년 개업 당시 모차르트가 기념 연주를 했던 이 카페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슈테판 츠바이크, 알프레드 아들러 등이 인생과 예술을 논했던 곳이다. 디저트 케이크 자허도르테로 유명한 카페 자허(Sacher)도 있다. 이곳에서는 오리지널 자허도르테를 맛볼 수 있다. 자허도르테는 1832년 프란츠 자허가 만든 초콜릿 케이크인데, 이 카페는 1837년 그의 아들이 개업한 카페다. 빈 카페의 전형적 이미지가 된 ‘두툼한 커피 잔과 한 조각의 케이크’는 이 카페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 외에 빈대학교 근처의 카페 란트만(Landtman)은 빈 의대 학생이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단골이었고, 카페 무제움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가 처음 만났던 곳으로 예술가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반면에 의자 하나 없이 작은 창문만 있는 초소형 테이크아웃 카페 펜스트 카페(Fenster cafe)도 눈길을 끈다. 이 카페의 스페셜 메뉴는 초콜릿으로 코팅한 나팔 모양의 와플콘에 담겨져 나오는 마키야토 커피다.

이처럼 거리 곳곳에 산재한 역사유적 사이에서 품위와 존재감을 드러내며 역사에 오를 만한 카페만 해도 50여 곳이나 된다고 한다. 이 카페 문화는 빈을 설명하는 빈 최고의 문화라 할 것이다. 그래도 빈의 카페를 상징하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카페 첸트랄(Central)이다. 베네치아의 플로리안이나 파리의 프로코프가 17~18세기 유럽 카페 역사의 제1세대라고 한다면 제2세대인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전형적인 카페가 이곳이다. 원래 19세기 중엽 빈의 카페를 대표한 것은 1847년에 문을 연 ‘그리엔슈타이들(Griensetidl)’이었다. 그곳에는 알텐베르크, 헤르만 발, 슈니츨러, 호프만스탈 등 빈의 세기말 문학을 대표하는 ‘청춘 빈파’가 단골로 상주하였으나 도시개혁으로 1897년에 헐리게 되었다. 그리고 새 둥지를 찾은 곳이 바로 1868년에 문을 연 이 카페였다. 당시 첸트랄은 ‘청춘 빈파’는 물론 츠바이크, 웰페르, 웨디킨스 등의 작가들과 화가 코코슈카, 부르크극장의 배우 등 당대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그 외 아르투어 슈니츨러, 로베르트 무질 같은 작가들과 알프레드 아들러,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도 단골이었으며, 트로츠키와 스탈린, 히틀러도 즐겨 찾았다.

매일 아침 22개 언어로 이뤄진 250개의 신문철을 비치해놓아서 새로운 정보와 지식에 갈증을 느끼는 지식인들에게는 응접실 겸 도서관 역할을 했다. 이 카페의 단골이었던 작가 포르거는 ‘카페 첸트랄’이라는 에세이에서 “카페 첸트랄은 빈의 위도와 고독의 자오선이 교차하는 지점”이라고 했다. 그러나 카페 첸트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페터 알텐베르크다. 그의 동상이 입구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괴짜 시인으로 알려진 그는 이 카페를 자신의 집주소로 삼은 최고의 단골이자 터줏대감이었다. 그는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언제나 첸트랄에 앉아 있었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 대해 한 동료 작가는 “카페의 한복판에서도 그의 눈에는 산골짜기의 일출과 빛나는 바다가 보였다. …그의 감성은 습관이나 관례에 아랑곳 않고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고 묘사했다. ‘빈의 소크라테스’로 불린 그는 자기 생활비를 누군가가 대주는 것에 대해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백원씩 얻어 술을 사먹었다는 천상병 시인이 떠올라 슬며시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천 시인을 비롯하여 이청준, 김지하, 김승옥, 김민기, 전혜린 등이 단골이었다는 혜화동 학림다방도 겹쳐진다.

카페 내부의 기품 있는 장식과 고급스러운 테이블은 세월의 흔적을 드러내며 낭만주의 시대로 데려간다. 비엔나 커피 아인슈페너 한 잔을 시켜 놓고 무심한 듯 정겨운 눈길의 알텐베르크 동상을 마주보며 생각에 잠긴다. 보헤미안을 자처했던 알텐베르크는 정작 카페 첸트랄이 그의 집이 되어 돈을 뜯으며 멋있게 살았는데, 우리의 천상병 시인은 ‘백 원’씩 얻어 쓴 돈이 빌미가 되어 국가권력에 의해 감옥살이를 하고, 생사조차 알 수 없어 생전에 유고시집을 낸 최초의 시인이 되었다. 문화의 깊이와 사회의 품격에 대해 다시 곱씹는다.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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