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지방정치가 망치는 지방자치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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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1-17   |  발행일 2019-01-17 제31면   |  수정 2019-01-17
20190117
허석윤 기획취재부장

작년 이맘때만 해도 기대가 컸다. 정말 이번에는 잘되리라는 희망이 넘쳤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달라진 건 거의 없다. 요란한 말 잔치에 ‘희망 고문’ 시간만 길어졌을 뿐. 앞으로가 더욱 문제다. ‘빈수레’만 계속 끌다 보면 지치기 마련 아닌가. 다름 아닌 지방분권 이야기다.

고사목(枯死木) 신세인 지방에 그나마 희망의 꽃을 피운 건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대선후보 시절부터 지방을 살리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방제 수준의 자치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을 이루겠노라고 약속했다. 빈말은 아니었다. 집권 후 행동에 나섰다. 분권과 균형발전을 주요 국정과제로 채택했다. 그리고 지난해 3월 지방분권 강화를 명시한 정부 개헌안을 발의했다. 개헌안은 6·13 지방선거 때 동시투표를 통해 통과가 될 듯도 싶었다. 당연히 지방은 들떴다. ‘중앙’에 짓눌려 성장이 멈췄던 ‘미숙아’ 신세에서 벗어나리란 기대로 한껏 고무됐다. 하지만 개헌은 없던 일이 됐다. 앞으로 기약도 없다. 서울식 표현을 빌리자면 ‘촌사람’들이 김칫국만 마신 셈이다.

역시 그랬다. 중앙의 거대 기득권 세력이 순순히 지방에 권한을 나눠줄 리가 없었다. 보수 정치권과 일부 언론이 손잡고 지방분권에 딴죽을 걸고 나섰다. 알다시피 그 중심에는 자유한국당이 있었다. 정부의 지방분권 개헌안에 대해 색깔론 공세까지 서슴지 않았다. 급기야 ‘북한식 연방제 통일 목적의 사회주의 개헌’이라며 핏대를 세웠다. 결국 개헌과 국민 투표를 깔아뭉개는 데는 성공했다. 그럼에도 한국당은 지방선거에서 참패했지만 기존 입장은 크게 변한 게 없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중앙 정치권의 정략 탓에 지방의 자주권 확립이 요원한 현실이다. 개헌이 무산되자 정부는 입법을 통해 지방분권을 계속 추진한다지만 지지부진하다. 지방자치법 전면 개정안, 지방이양일괄법 등 핵심 법안들이 국회 문턱을 넘을지도 의문이다. 대통령과 정부 의지가 강하다 해도 결정적 시기에 상실된 추동력을 회복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지방분권의 걸림돌이 외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지방 내부가 더 문제다. 불편하지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법과 제도만 갖춰지면, 중앙의 간섭과 통제만 없다면 지방은 온전한 자치와 분권을 구현할 수 있을까.’ 자신하기 힘들다. 특히 지방정치의 현 수준을 보면 답답증까지 생긴다.

요즘 예천군의회 의원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언론도 연일 대서특필한다. 그럴 만도 하다. 해외연수를 한다는 의원들이 가이드를 폭행하고, 여성 접대부를 불러달라고 졸라댔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혈세로 놀러다니는 것도 모자라 동네 양아치 같은 추태로 나라 망신까지 시켰으니 어떤 변명도 용납이 안 된다.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여론은 ‘주먹질 의원’뿐만 아니라 예천군의원 전원 사퇴를 요구한다. 또한 의원 해외연수 폐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초의회를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예천군 의원에게 가이드만 폭행당한 게 아니다. 지방 정치권 전체가 흠씬 두들겨 맞은 꼴이다. 최소한의 도덕성도 갖추지 못한 함량미달의 정치꾼이 활개치면 어떤 재앙이 닥치는지 새삼 증명됐다. 이런 ‘인재(人災)’를 막지 못하면 지방자치는 치명적 손상을 피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지방의원 한두 사람이 지방자치를 도루묵을 만들어 놨다. 그렇지만 망신을 시킨 꼴뚜기가 죄지, 어물전(지방정치)은 확연히 싱싱해지고 있다”고 했다. 지방자치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겠지만 얼마나 많은 국민이 수긍할지는 의문이다. 어물전의 꼴뚜기가 극히 일부라고 믿고 싶어도 근거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비리와 추문을 접하다보면 어물전이 멀쩡한지 의심이 들 정도다. 지방정치의 셀프개혁은 아무래도 기대난망이다. 주민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무관심과 냉소주의의 토양위에서 ‘풀뿌리 민주주의’가 자랄 순 없다. 주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통제가 없다면 지방자치와 지방분권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허석윤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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