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근대, 새로운 100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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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1-16   |  발행일 2019-01-16 제31면   |  수정 2019-01-16
20190116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3·1 만세운동에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딱 한 세기,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제 강점에 이은 동족간의 전쟁, 그리고 그 이후 길고 긴 독재정권의 폭압정치에서 풀려나기까지 꼬박 한 세기의 세월이 흘러야 했던 셈이다. 역경과 통곡, 환멸의 한 세기가 저물고 한민족의 새로운 백년을 위한 토대를 다져야 할 지금, 희망보다는 납덩이같은 절망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떤 수준의 사회인지를 박종철 예천군의원이 온몸으로 시연했다. 깃털만한 권력을 가져도, 한 계단만 더 높은 지위에 올라있어도, 겨우 반나절 정도의 선임이라도 아랫 사람을 때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사회가 근대사회로 진입한 지 100년이 되는 한국사회의 모습이다. 군대나 체육계는 말할 필요도 없고, 선배들이 후배들을 모아놓고 집단폭행하는 것이 학과의 전통이라고 자랑하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대한민국 외에 또 있을까. 내가 가르치는 제자라면, 내가 임금을 주고 고용한 피고용자라면, 폭언·폭행은 스승이나 고용주의 정당한 권리로 인정될 정도다. 여직원이나 여제자들에게는 수청까지 들라 요구한다.

길거리에서 후배교수들을 꿇어 앉혀놓고 얼굴에다 발길질을 해대던 의대교수는 보직만 살짝 내려놓고 여전히 관련 분야의 권위자인양 거들먹거리고 있을 것이고, 상습적인 폭언·폭행으로 후배검사를 자살로 내몬 부장검사는 검찰조직에서 떨어져 나오긴 했지만, 아마도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을 게다. 지금쯤 박종철 군의원은 군의회에서 고용한 가이드가 마음에 안 들어 ‘의원님’이신 자신이 직접 나서 손 좀 봤기로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것인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가 국회의원 신분이라거나 재벌에 맞먹는 재력가든지 서울을 휘젓고 다니는 교수나 의사·판검사 같은 신분이라면 경찰에 소환되기는커녕 피해자가 문제제기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폭언·폭행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의 풍경이다. 박종철 군의원이 주먹을 휘두르고 있을 때 주변의 동행한 의원들은 “맞아도 싸다” 아니면 “맞을 짓을 했겠지”라는 표정으로 자기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양진호 회장의 폭행이 일어나는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 병영에서, 직장에서 상급자의 폭언·폭행이 끊이지 않는 제일 큰 이유도 “맞을 짓을 했겠지”라는 주변의 방조·방관 때문이다. 성추행 피해 여성에게는 “꼬리를 쳤겠지”라는 의심이 따라 붙는다. 근대시민사회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위계에 의한 폭행·추행이 거의 모든 조직의 집단문화로 뿌리내린 데는 사법부가 가해자에게는 한없는 관용을 베푸는 대신, 피해자에게는 ‘피해자다움’을 스스로 입증하라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피해자다움을 입증하지 못했을 때는 가해자의 가혹한 반격이 시작된다. 그 반격 또한 사법부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피해자는 두 번 죽는다.

그런 사법부의 수장 자리에 있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주에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되었다. 그는 검찰측 주장과 달리 재판에 개입한 적이 없음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사실일지도 모른다. 대법관에서부터 말석 판사까지 그의 눈빛만 보고서도 알아서 기었을 테니까. 엽기적인 괴성을 지르며 아랫사람이나 피고용자에게 폭언·폭행을 일삼던 한진그룹의 세모녀가 한몸처럼 모두 구속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양승태 대법원장 퇴임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봉건사회와 달리 근대시민사회의 형벌체계에서 사형(私刑)과 태형(笞刑)은 철저하게 금지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구시대의 유물인 사형과 태형이 활개를 친다. 아직도 이런 봉건잔재가 청산되지 않는 이유는 사법부의 저울이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범죄행위와는 무관한, 한국 사법부의 태생적 속성이다. 사법개혁 없이는 새로운 100년의 역사도 불평등과 부조리로 신음하는 통곡과 환멸의 한 세기가 될 지도 모른다.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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