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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음악 창의도시 대구 .6] 성악가이자 작곡가…음악 거장 권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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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관영기자
  • 2019-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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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로 대구서 성악 독창회 연 한국음악의 숨은 공로자

대구시 중구 향촌동 향촌문화관에 재현된 백조다방은 6·25 전쟁 당시 권태호의 단골집이었다. 광복 직전 일본에서 귀국한 권태호는 처가가 있는 청송에서 은거하다 대구에 정착했다. <작은사진> 향촌문화관 상설전시실에 권태호의 사진이 걸려 있다. 권태호는 한국 최초의 독창회를 연 인물로, 대구·경북의 음악 발전과 보급에 공헌했다. <영남일보 DB>
그는 성악가였고 작곡가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독창회를 가졌으며 독일 예술가곡을 우리나라에 처음 알린 성악가였다. 국내와 일본, 만주 곳곳에서 수많은 독창회를 개최하였고, 처음으로 우리말로 된 찬송가를 빅터 레코드사에서 취입한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봄나들이’ ‘눈, 꽃, 새’ 등의 동요와 ‘조선의 노래’ ‘해방의 노래’ ‘건국행진곡’ ‘대구능금노래’ 등을 쓴 작곡가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거부하고 변절하지 않았다.

광복 후에는 대구에 정착해 대구·경북의 음악 발전과 보급에 공헌하였으며 크게는 한국음악계의 숨은 공로자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는 권태호(權泰浩)다.

#1. 서울서 독일연가곡으로 독창회

성악가이자 작곡가인 권태호는 독일 예술가곡을 우리나라에 처음 알리는 등 한국음악계의 숨은 공로자로 평가받고 있다. <영남일보 DB>
권태호는 1903년 9월16일 안동 율세동 13번지 일명 밤적골(소천 권태호 음악관 홈페이지에는 안동군 법석골 17번지, 현재 화성동 17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권중한(權重漢), 어머니는 김귀행(金貴行)으로 2남2녀 중 장남이었다. 안동의 초창기 기독교인이었던 아버지는 훗날 평양신학교를 거쳐 목사가 될 만큼 독실했다. 권태호는 8세 즈음 아버지를 따라 안동예배당(현 안동교회)에 갔을 때 처음으로 풍금소리를 듣게 되었다. 권찬영 선교사의 부인 권애라의 찬송가 반주였다. 이후 그는 안동보통학교를 다니며 인노절 선교사의 부인으로부터 오르간을 배우고 권애라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15세 때부터는 안동예배당의 반주자로 활동하고 성가대 지휘를 맡는가 하면 때때로 독창을 하며 음악적 재능을 드러냈다.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했다고 한다. 권태호는 1919년 17세 때부터 안동우편국(현 삼산동우체국)에서 통신수로 일했다. 그리고 1923년 청송 출신의 윤옥선(尹玉璇)과 기독교식으로 결혼한 후 이듬해 홀로 일본으로 떠났다. 그는 동경에서 신문팔이로 생계를 이으면서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의 야간 속성반을 졸업했다. 그리고 1925년 일본고등음악학교 본과 성악부에 응시,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합격하게 된다. 재학 중인 1927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베토벤 100년제’에 발탁되어 독창자로 출연하기도 했다. 권태호는 본과 2학년인 1928년에 일본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도쿄 거리에 권태호 독창회 포스터가 나돌자 평론가 기무라 쇼지는 권태호를 혹평하는 기사를 발표한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뒤 기무라 쇼지는 신주쿠의 어느 요릿집에서 권태호에게 술을 샀다고 한다. 이 공연에서 권태호는 4번의 재청을 받아 ‘낙화암’ ‘사우’ ‘해변의 노래’ ‘불어라 봄바람’ 등을 계속 불렀다.

권태호는 잠시 고국으로 돌아와 1928년 5월12일 서울 기독청년회관에서 독일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로 독창회를 가졌다. 이 공연은 한국인 최초의 독창회이자 독일 예술가곡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알린 계기가 되었다. 이어 7월14일에는 대구제일심상소학교(중앙초등학교) 대강당에서 그의 독창회가 열렸다. 대구 최초의 독창회였으며 권태호의 동생 권태희 등이 찬조 출연했다. 9월14일에는 서울 기독청년회관에서 박태준과 권태호가 함께 한 독창회가 열렸다. 박태준이 작곡한 곡들을 박태준의 반주로 권태호가 노래한 공연이었다. 이는 한국인이 한글로 된 노래를 처음 선보인 의미 깊은 자리였다.

권태호는 1928년부터 1929년까지 계속 일본과 한국에서 독창회를 개최했다. 일본의 요코하마, 고베, 오사카, 아마가타, 시즈미, 교토, 한국의 안동, 군산, 원산 등이었다. 권태호는 일본고등음악학교를 4년간 다니고 1929년 3월 졸업했다. 그리고 그해 가곡 ‘조선아들행진곡’과 ‘사향(思鄕)의 노래’를 작곡했다. 1930년에는 도쿄에서 제2회 독창회를 가졌다.

#2. ‘봄 나들이’의 탄생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 떼 쫑쫑쫑 봄나들이 갑니다.’ 윤석중 작사 권태호 작곡의 ‘봄 나들이’다. 밝고 맑고 가볍고 단순하며 희망적이고 어딘가 중독성이 있는 이 노래가 1930년 5월에 태어났다. 이 해에 귀국한 권태호는 박태준이 작곡한 동요 10여곡을 박태준의 피아노 반주로 노래하는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강사로 출강하며 경성방송국에서 고전음악을 담당했다. 이후 권태호는 동요 ‘허수아비’를 작곡해 발표하지만 일제에 의해 금지당하고 만다. 12월에는 동아일보사 학예부에서 ‘조선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신춘대현상모집을 공고하여 당선 시가(詩歌)를 보급한다. 이 때 시에 곡을 붙인 이가 현제명, 시조에 곡을 붙인 이가 권태호다. 훗날 그는 자신이 작곡한 ‘조선의 노래’를 평양에서 열린 독창회에서 부르다가 일경에 의해 음악회가 중단되기도 했다.


“나리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동요 ‘봄나들이’작곡가이자 성악가

안동서 출생 어릴때부터 음악 재능
한국인 최초로 일본 성악부에 합격
독일 예술가곡 처음으로 국내 소개

일제 억압 굴복않고 창씨개명 거부
희망주는 노래로 국민들 마음 위로
동요·교가·군가·국민가요 등 작곡
은퇴이후 후진양성·음악보급 앞장



1931년 권태호는 평양 광성고보의 음악교사가 되었다. 그는 평양, 안동, 청송, 부산, 대구, 함흥, 의천, 서울 등지에서 독창회를 이어 나갔다. 1933년에는 동요 ‘눈, 꽃, 새’를 발표하였고, 만주 무순지역의 조선인 유치원을 위한 독창회, 해주 구세주 요양원의 환자들을 위한 독창회 등을 열었다. 그는 국내 방방곡곡, 일본, 만주 등지에서 무려 200여 회에 달하는 독창회를 열었고 민족혼을 일깨우는 노래를 불렀으며 결코 변절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1938년에는 평양음악연구소를 개설했고 이듬해에는 한국인 처음으로 일본고등음악학교에 강사로 취임했다. 1939년 일본 빅터 레코드사의 초청으로 찬송가 ‘하늘가는 길’과 ‘주 음성 외에는’을 취입했다. 우리말로 부른 최초의 성가였다. 1942년 도쿄에서 제3회 독창회를 가졌고 1944년에는 한국인 처음으로 일본고등음악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광복 직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3. 광복 후, 대구에 정착하다

귀국한 그는 처가가 있는 청송에서 은거하다 광복과 함께 대구에 정착했다. ‘해방의 노래’ ‘건국행진곡’ ‘새 나라는 부른다’ 등을 작곡하고 대구에서 경북문화건설연맹 음악동맹위원장 을 맡으며 경주예술학교 창립에 진력을 쏟았다. 1946년에는 대구음악학원(大邱音樂學院)을 개설하고 국민 계창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대구능금노래’ ‘농부의 노래’ ‘일터로 일터로’ ‘기역니은 배우세’ ‘누에를 치세’ 등을 작곡했다. 1948년에는 상화시비(尙火詩碑)를 위한 기념곡을 작곡했다. 이 해에 그가 개설했던 대구음악학원이 인근 6연대 반란사건의 여파로 군에 강제 접수되어 문을 닫았다.

1949년 권태호는 ‘국민가요집’을 발간했다. 당시 농림부와 문교부 문화국에서 추천 권장한 곡들을 지원금을 받아 발간한 것으로 일반 대중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노래책이었다. 책에는 ‘대한의 노래’ ‘대한 아기 행진곡’ ‘기역니은 배우세’ ‘누에를 치세’ ‘대구능금노래’ 등이 수록되었으며 노래마다 해설과 설명이 더해져 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다. 친동생 권태희가 납북되었고, 그는 국방부 정훈국 전문위원으로 종군하며 ‘승리의 노래’ ‘보병의 노래’ ‘호국의 노래’ ‘백두산 행진곡’ ‘9사단가’ 등 군가를 작곡했다. 1951년 권태호는 통영으로 이주했다. 동요 ‘어여쁜 혜숙이’를 작곡했고 통영 봉래극장에서 독창회를 여는 한편 대구를 오가며 대구한미친선예술제에서 독창을 하기도 했다. 1953년에는 다시 경주로 이주해 가곡 ‘백합화’ ‘경주찬가’ 등을 작곡했다. 이때도 역시 권태호는 대구를 오가며 대구 자유극장, 문화원, 대구 중앙국립극장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1956년에는 제1회 경북도 문화상 음악부문 공로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은퇴 독창회를 대구 청구대학 강당에서 가졌다.

은퇴한 이후에도 권태호는 음악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1959년 그는 다시 대구로 이주해 ‘국민가요합창단’을 창립, 노래 보급에 힘썼다. 1960년 제1회 대구시문화상을 수상했고, 1961년에는 대구시 대봉동에 ‘권태호음악연구소’를 개설했다. 1963년에는 대구공회당에서 국민가요합창단 창립공연을 개최했다. 그는 1964년 모든 공적인 활동을 떠나 큰아들이 있는 서울로 이주했다. 이후 1970년 안동으로 옮겨 동부동 198번지에 ‘권태호음악연구소’를 개설해 은거했다. 1971년 12월29일 부인 윤옥선이 세상을 떠났다. 2개월 뒤인 1972년 2월29일, 권태호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소는 안동시 와룡면 오천 2리 산103이다. 신암국교, 삼덕국교, 인지국교, 대봉국교, 대구여중, 신라중학, 안동중학, 안동농고, 대구고, 능인고, 경명여고 등의 교가가 모두 그의 작곡이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손태룡, 한국 서양음악가 연구, 도서출판보고사, 2011. 손태룡, 대구의 전통음악과 근대음악, 영남대학교출판부, 2018. 소천 권태호 음악관 홈페이지. 대구광역시, 대구근대문학예술사, 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근현대사사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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