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교육] 心齋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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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1-14 07:50  |  수정 2019-01-14 09:16  |  발행일 2019-01-14 제17면

‘장자’ ‘인간세(人間世)’에는 안회가 위나라 군주의 폭정을 저지하려고 스승의 허락을 구하는 내용이 있다. 이때 공자는 안회를 말리면서 심재(心齋)를 이룬 뒤에 가라고 한다. 안회가 어떻게 심재를 할 수 있는지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먼저 마음과 뜻을 한곳에 모아야 한다. 유학에서는 이를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고 한다. 주일무적을 처음 배우는 사람은 보통 호흡에 집중한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되 잡념이 떠오르면 얼른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귀로 듣는 것은 단지 소리를 듣고 해석하는 것이지만, 마음으로 듣는 것은 오직 소리에 집중하여 마음과 소리가 하나로 공명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듣게 되었거든 이제 마지막 단계로 마음이 아니라 기(氣)로 들어야 한다. 이것이 심재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기로 듣는다는 것은 어떻게 듣는 것일까?

기는 우주 삼라만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에너지다. 우리 몸 역시 기로 가득 차 있고, 기의 에너지에 의해 생명을 유지하고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장자는 기의 변화 혹은 취산(聚散)으로 인간의 생사를 설명한다.

‘그 시초를 살펴보면 본래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태도 없었다. 단지 형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본래 기도 없었다. 망홀(芒笏)한 사이에 섞여 있다가 변해서 기가 생겨나고 기가 변해서 형태를 이루고 형태가 변해서 삶이 있게 되었다. 이제 또 변해서 죽게 되었으니 이는 춘하추동을 위해 사시가 운행하는 것과 같다. 그는 또 지금 큰 방에 언연(偃然)히 자고 있다.’

언연(偃然)이란 말은 편안히 자는 모양이라는 뜻이다. 언연히 자고 있는 그 사람이란 곧 장자의 처로, 위의 말은 장자의 처가 죽었을 때 혜자가 문상을 가서 나눈 문답 중 일부다. 기로 듣는다는 것은 모든 감각을 떠나고 또 모든 생각에서 벗어나 다만 하나의 기로써 소리를 듣는 것이다. 기에는 ‘나’라고 하는 생각이 없다. 기는 모든 존재에 편만하여 분리 독립된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기는 텅 비어 있다. 바로 이 텅 빈 자리에 도(道)가 모인다. ‘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텅 비워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심재다.

심재를 깨달은 사람의 마음은 거울과 같다. 거울은 배웅도 마중도 하지 않으며, 사물에 응하면 있는 그대로 비출 뿐 그것을 간직하지 않는다. 이처럼 ‘나’라는 변하지 않는 자성(自性)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 그것이 견성(見性)이다. 그런데 견성은 결코 스승이 대신해 줄 수 없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곧바로 제자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은 스승이 할 수 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텅 비워 하나의 기로 존재하는 것은 제자 혼자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해야 할 경지다. 분별하는 지식은 주고받을 수 있지만 도는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텅 빈 방에 밝은 빛이 가득하다. 밖으로 향하는 눈과 귀를 안으로 거두고, 마음으로 헤아려 아는 지식(心知)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만물의 변화에 자유자재로 응할 수 있고, 만물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마음속의 모든 분별을 다 버리고 텅 비워버리면 머무름이 없이 물처럼 흘러갈 수 있다. 그리고 텅 비어 있는 바로 그곳에서 모든 것이 일어난다. 심재를 터득한 사람은 텅 빈 배와 같아 어떤 사람을 만나도 쉽게 설득할 수 있다.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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