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음악 창의도시 대구 .5] 음악천재와 친일음악…두 이름의 현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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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관영기자
  • 2019-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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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생각’‘희망의 나라로’…일제강점기 음악천재의 ‘빛과 그림자’

대구시 중구 제일교회에는 ‘현제명 나무’라고 이름 붙여진 200여년 된 이팝나무가 서있다. 대구에서 태어난 현제명은 계성학교 재학 중이던 1917년, 혼성합창단인 제일교회찬양대 단원으로 활동했다.
계성학교 맥퍼슨관. 맥퍼슨관은 건축 당시 제2교사동으로 과학실, 음악실 등 특별교실로 사용되었는데, 이때 음악실에서 현제명과 박태준이 함께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현제명(玄濟明) 또는 구로야마(玄山). 성악가이자 작곡가이며 교육가이고 행정가였던 그에게는 두 개의 이름이 있다. ‘대구가 낳은 음악천재’라 불리며 불후의 ‘고향생각’을 지었으며 애국계몽운동에도 발 담그고 가난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위해 기꺼이 무대에 올랐던 현제명. 또는 친일단체에 몸담고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가요를 작곡하고 노래했던 ‘친일 음악계의 대부’라 불리는 구로야마. 그의 마지막 작품은 그가 대본과 곡을 쓴 가극 ‘왕자 호동’이다. 애국과 사랑의 갈등을 모티브로 하는 오래된 이야기였다.

현제명
남산동 출생, 제일교회 찬양대 활동
대학서 특별활동으로 서양음악 접해
계성학교 출신 ‘교남4중창단’ 조직
단원들과 전도·애국 계몽운동 펼쳐

미국 유학시절에 만든 ‘고향생각’
민족 슬픔·고국에 대한 그리움 담아
귀국 후 고향 대구서 첫 독창회 개최
학교 재직 중 조선음악가협회 창설
콩쿠르 개최 등 음악 보급에 앞장서

日, 연희전문학교 음악활동 탄압에
조선총독부 친일문예단체에 가입
식민통치·침략전쟁 지지 가요 작곡


#1. 대구 출신 현제명

현제명은 1903년 1월6일 대구 남산동 139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현문구, 어머니는 최국희로 2남2녀 중 차남이었다. 그는 제일교회 신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제일교회에서 시작된 기독교재단의 남자부 교육기관인 대남소학교에 1909년 입학했고, 1913년에는 같은 기독교재단인 계성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어머니 최국희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12세였다. 계성중학교 학적부에는 그의 성적이 1학년, 2학년, 4학년 3년 동안만 기록되어 있으며 1918년 11월28일 퇴학 처분을 받았음이 확인된다. 이는 어머니를 잃은 사춘기 소년의 심리적인 격동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한편 현제명은 계성학교 재학 중이던 1917년 박태원이 대구에서 처음으로 조직했던 혼성합창단 제일교회찬양대의 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현제명은 1919년 대구를 떠나 1920년 평양 숭실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숭실대학에는 음악과가 없었지만 특별활동을 통해 다양한 서양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솔트(Soltau) 부인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레토스(Retos) 부인에게 성악지도를 받았다. 숭실대학합창단에서 노래하고 악대부에서 코넷(cornet)을 다루었으며 교회에서 오르간을 반주했다.

또한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들과 모임을 만들어 합창을 하거나 피아노 등을 연주하기도 했다. 입학한 해에는 박태준이 계성학교 출신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교남4중창단(영남4중창단)’ 일원으로 활동하며 전도 및 애국 계몽운동으로서의 학생 활동을 펼쳤다. 숭실대학에 다니는 동안 현제명은 학교의 목공부나 선교사의 집안일을 봐주며 학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1924년 평양 숭실대학을 졸업한 현제명은 전주에 있는 기독교재단의 신흥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영어 과목을 주로 맡았으며 음악도 아울러 가르쳤다. 같이 근무하던 정우석 시인과 함께 ‘숨은 노래’라는 동서애창곡을 번역해 등사판으로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이는 아름다운 노래 부르기 운동의 일환으로 전주지역에 신선한 문화적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전주 서문밖교회의 성가대를 맡아 지휘했으며 12명의 소녀들로 구성된 ‘소녀가극회’를 조직해 전주, 익산, 군산 등의 극장에서 순회공연을 가졌다.

#2. 미국 유학과 ‘고향생각’

현제명은 1926년 9월 숭실대학 때 인연을 맺었던 로드히버(Homer A. Rodeheaver)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로드히버는 20세기 초반 미국 교회음악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다. 현제명은 우선 로드히버가 재직 중인 시카고의 무디 성경학교(Moody Bible School)에서 신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인디애나주 건 음악학교(Gunn school of Music)에 진학해 성악을 전공하고 1928년 졸업, 이듬해 연구과를 마치고 음악학사 학위를 받았다. 학업 중이던 1927년에는 북미 음악대회에 출전해 성악부문 1등으로 입상하기도 했다. 33개국 200명의 음악가가 참여한 대회였으며 한국인은 현제명과 김태술, 추경애 등 3명으로 모두 대구 출신이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익숙한 ‘고향생각’이다. 이 곡은 현제명이 유학시절 만든 곡이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당시 일제의 지배하에 있던 민족의 슬픔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이 외에도 ‘산들바람’과 찬송가 몇 곡이 미국에서 작곡됐다. 그는 유학을 마치고 1929년 귀국하자마자 제1회 독창회를 고향인 대구에서 가졌다. 이어 제2회 독창회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자작곡인 ‘고향생각’을 불렀다고 한다.

현제명은 연희전문학교 음악 및 영어 전임강사로 부임했다. 그는 연희중창단 및 연희합창단, 연희관현악단을 조직했고 교양과목과 특별활동의 음악부를 육성해 음악보급에 힘썼다. 1931년에는 조선음악가협회를 창설하여 초대 이사장직을 맡아 활동했고 1932년부터는 젊은 음악학도들을 고무시켜주기 위해 동아일보사와 함께 음악 콩쿠르를 개최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것인데 6·25전쟁 이전까지 매년 실시됐다.

1932년에는 ‘현제명 작곡집’ 제1집이 발간되었다. 작곡집에는 이은상 작사 현제명 작곡의 ‘조선의 노래’가 실렸지만 이 곡은 1938년 일제에 의해 금지곡이 된다. 광복 이후 조선의 노래는 ‘대한의 노래’로 제목을 바꾸고 가사를 약간 손질한 뒤 널리 불리게 됐다. 1933년에는 두 번째 작곡집이 발간됐으며 ‘가고파’ ‘그집앞’ ‘희망의 나라로’ 등 42곡이 수록됐다. 같은 해 현제명, 홍난파의 작품발표연주회가 이화여학교 강당에서 열렸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작곡 발표회였다. 이날 현제명은 ‘관덕정’ ‘옛동산에 올라’ 등을 노래했다.

현제명은 홍난파와 여러 번 함께 공연했다. 다양한 지역 교회에서의 초청에도 기꺼이 응하였고 국민구제모금을 위한 독창회를 열기도 했다. 1934년에는 대구에 홍수가 나자 수해구제 독창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현제명은 1936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음악연구원에서 ‘자연발성법의 원리와 그 결과’라는 논문으로 음악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37년 2월 귀국했다. 이즈음 일제는 연희전문학교의 음악활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대외적인 활동들이 모두 중단됐다. 이러한 가운데 현제명은 1937년 5월,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친일문예단체인 ‘조선문예회’에 가입했다.

#3. 친일의 이름 ‘구로야마’

1937년 6월, 한인 지식인 다수가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른바 ‘수양동우회 사건’이다. 수양동우회는 1926년 안창호가 서울에서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민족운동단체로 대부분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회관을 건립하고 기관지 ‘동광(東光)’을 발간해 계몽운동에 앞장서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된 것이었다. 1938년 3월까지 회원 181명이 붙잡혔다.

현제명은 관련자로 지목, 피검되었다. 연희전문학교에는 사직원을 제출했다. 그는 수양동우회 단번 1010번이었다. 이후 그는 사상전향서를 쓰고 풀려나게 된다. 연희전문학교에도 복직되었다. 가족 모두가 개명을 하게 된다. 그의 이름은 구로야마 즈미아키(玄山濟明)였다.

이후 현제명은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가요를 작곡하고 친일단체에 가입했다. ‘음악보국대연주회’에 출연해 노래했고 수익금 모두를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국방헌금에 헌납할 것을 결의했다.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이 후원한 국민음악연주회에서 개창지도했다. 경성후생실내악단이사장, 조선음악협회 이사, 음악기예자 자격시험 심사위원 등으로도 활동했다. 1945년 5월 ‘결전음악 수립과 활발한 공연 공적’을 기려 신태양사가 주는 조선예술상을 수상했고, 부상으로 받은 500원을 해군휼병금으로 헌납했다.

광복이 되었다. 현제명은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발기인 겸 중앙위원회 문교부 위원에 선임되었으며 고려교향악단을 조직해 1948년까지 운영했다. 1946년 2월 경성음악연구원이 경성음악학교로 인가받으며 교장으로 취임했고, 10월 서울대 예술대학 음악학부로 편입되면서 초대학부장을 맡았다. 1948년 한국음악원을 설립하고 1949년 문교부 예술위원회 음악분과위원회 위원으로 위촉, 한국음악가협회를 조직했다.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에 선임되었으며 이듬해 제1회 예술원상을 받았다. 그는 아시아음악협회 총회, 유네스코 국제회의 등에 참석해 한국음악이 세계로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현제명은 1959년 서울대에 처음으로 국악과를 설립했다. 창작 가야금 음악의 창시자이자 독보적 존재로 이름을 높았던 황병기(黃秉冀)는 현제명을 이렇게 술회했다. “국악이 미천한 옛 음악으로 여겨질 때 신념을 가지고 국악의 가치를 재조명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그가 없었다면 지금쯤 우리 국악은 더 많은 설움을 감내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현제명은 1960년 10월16일 고혈압으로 쓰러져 간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1965년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현제명 또는 구로야마의 전 인생을 관통하는 것은 음악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손태룡, 한국 서양음악가 연구, 도서출판보고사, 2011. 손태룡, 대구의 전통음악과 근대음악, 영남대학교출판부, 2018.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근현대사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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