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의 스토리 오브 스토리 .1] 기억과 다큐멘터리 그리고 문학

  • 최은지
  • |
  • 입력 2019-01-03   |  발행일 2019-01-03 제14면   |  수정 2019-02-20
문학적 성취 이룬 다큐멘터리, 이야기의 힘으로 사람들 기억 되살려
20190103
일러스트=최은지기자 jji1224@yeongnam.com
20190103

2015년의 노벨문학상은 우크라이나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게 돌아갔다. 이 결정은, 팝 가수 밥 딜런에게 수여된 다음해의 노벨문학상과 더불어,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소설가도 시인도, 극작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대표 저작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체르노빌의 목소리’ ‘아연 소년들’ 등인데 이들은 모두 다큐멘터리이다. 전쟁에 내몰린 여성과 소년들, 원전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과 안정적인 생활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섬세하고 깊이 있는 보고가 그녀의 글쓰기이다. 이들 저작이 수많은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각각이 하나의 소설처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문학적인 성취를 이루었다는 판단이 노벨문학상 선정의 이유였을 것이다.

사실 다큐멘터리가 문학이 아닐 이유는 찾기 어렵다. 문학 자체가 워낙 느슨한 규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문학의 기원이 기억에 닿아 있기도 한 까닭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문학예술은 뮤즈 신들에 의해 관장되는데, 이들은 바로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딸이다. 므네모시네의 아홉 딸들이 각각 서사시, 서정시, 희극, 비극, 합창가무, 독창가, 찬가, 역사, 천문을 담당한다. 기억의 여신의 딸들이 이들을 관장한다는 생각은, 현재 우리가 문학, 예술, 역사라고 부르는 인간 활동의 근원이 기억에 있음을 알려 준다. 문학이 기억에 닿아 있다는 점은 소박하게 생각해도 당연하다고 할 만하다. 문학 감상의 효과로 흔히 인간의 삶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을 말하는데, 독자가 누리는 이러한 경험의 대상이 작가 자신의 경험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흔한 까닭이다. 인간의 삶이나 사회를 탐구하는 소설의 경우 역사적인 성격을 짙게 띠게 마련인데, 이들이 과거에 대한 기억에 바탕을 두는 것도 분명하다.


소설 ‘영초언니’‘아무도 기억…’
개인 이야기로 공동체 역사 복원

민주화운동에 청춘 바친‘천영초’
의용군서 전쟁포로가 된‘정찬우’
‘1970년대’‘한국전쟁’ 상기 시켜



따라서 문학의 역할 중 하나로 이야기의 힘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들어도 지나칠 수 없다. 이야기의 힘이란 무엇인가. 말과 그것이 가리키는 실제의 관계를 바로잡으면서 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말과 실제의 관계가 어그러지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봐 왔다. ‘유체 이탈 화법’이니 ‘프레임 씌우기’ 등으로 비판되는 상황들 말이다. 이러한 상황이 한 편의 이야기로 기술되면, 말들이 가리키는 실제가 분명해지면서 진실과 거짓이 구분된다. 바로 이러한 이야기야말로 우리의 기억을 바로잡으며 생생하게 과거를 복원해 준다. 좀 더 나아가 이러한 이야기, 이러한 문학이 집단적 기억 공간의 틀로 기능하는 경우, 문학을 통해 문화와 제도의 원칙이 기억되고 존재하게까지 된다. 이러한 기능에 주목하면, 다큐멘터리와 문학의 문턱은 한층 더 낮아진다.

문학에 대한 우리의 좁은 생각을 넓혀 줄 다큐멘터리적인 소설 두 편이 이런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서명숙의 ‘영초 언니’(문학동네, 2017)와 안재성의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창비, 2018)가 그것이다. 서명숙은 제주도에 올레길을 만든 인물이다. 언론계에 오래 종사한 분으로 전문 작가는 아니다. ‘영초 언니’ 자체도 소설이라고 표기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누구라도 읽으면서 “소설은 아니네” 생각하게 되지도 않는다. 안재성은 ‘파업’으로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하며 노동문학 작가로 등단했다. ‘경성 트로이카’ ‘황금 이삭’ ‘연안행’ 등의 소설과 더불어 박헌영, 이현상, 이태준 등 우리 역사에서 지워졌던 인물들의 평전을 써 왔다.

서명숙의 ‘영초 언니’는 1970년대 운동권의 실제 인물 천영초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다큐멘터리나 평전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작가이자 서술자인 서명숙 자신의 이야기가 어린 시절과 현재의 삶까지 포함하여 비중 있게 들어가 있는 까닭이다. 서명숙과 천영초 두 사람이 함께 겪은 학생운동과 투옥이라는 특정 기간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되, 두 인물의 현재 상황까지 아우를 정도로 이야기 전체의 시간은 길다. 인물 또한 이 둘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청춘을 민주화운동에 바친 여러 인물들의 의지와 투쟁, 고초가 함께 제시된다. 학생운동 외에, 대학 진학을 앞둔 어린 시절의 포부와 학생운동 중에도 꽃을 피우는 연애, 민주화된 사회에서 생활인이 되어 살아가는 나날 등까지 내용이 풍성하게 마련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폭 속에서,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나은 천영초의 행적과 마음 씀씀이, 바람과 의지 등을 강조함으로써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천영초의 삶을 기리는 기록이 된다.

큰 교통사고로 현재 어린아이처럼 되어 버린 천영초라는 선배 언니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사랑이라는 서명숙의 시선이 덮여 있는 까닭에 ‘영초 언니’는 건조한 다큐멘터리나 평전과 거리를 둔다. 자신과 언니의 현재 삶이 전개되고 있는 2017년의 시점에서 이제 40년이 다 되어 가는 과거를 반추함으로써, 이 작품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삶을 살아 낸 이들에 대한 이상주의적인 미화와도 거리가 멀고 패배주의적인 감상과도 인연이 없게 되었다. 원숙한 생활인, 지식인의 시선으로 서명숙은, 그냥 잊혀서는 안 될 수많은 천영초들을 우리의 기억에 소환하고 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를 통해 안재성이 불러내는 기억은 시대 배경이 한국전쟁 전후라는 점에서 더 오래된 것이다. 여기서 작가가 강조하는 것은 전쟁의 역사적·이념적 성격이나 민족적 고난 등이 아니다. 물론 전쟁 통에 사람들이 겪는 참상과 전장의 참혹함이 리얼하게 그려지고, 이념 때문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제들도 상세하게 제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줄기는 정찬우라는 한 개인의 삶을 복원하는 것이다. 정찬우는 전북 고창 출신으로 만주에서 학교를 다니다 조선의용군 활동을 하고, 광복 후 평양여중 교무주임 겸 사범대학 강사로서 약혼을 앞두고 있다가 한국전쟁 초기에 영남지방 교육위원으로 임명되어 경상도로 내려온다. 낙동강 전선에 도착하여 무서운 전장을 체험하고, 후퇴 중 길이 막혀 빨치산과 보조를 맞추다 사로잡혀 2년간 포로 생활을 한다. 그 뒤 10년 형을 선고받고 수형 생활을 하다 4·19 직후 사면되어 마침내 고향 땅을 밟게 된다.

파란만장하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정찬우의 삶은, 인간사의 우여곡절 속에서도 유지되는 사람의 따뜻함이란 측면에서 기억된다.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민족상잔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표리부동한 처세술로 사람들을 해치는 악한들에도 불구하고 견지되는 올바른 삶에 대한 의지, 인간에 대한 존중 의식이다. 이렇게 안재성은 전략이나 이념보다 인간적인 소중함을 중시하고, 포로수용소와 교도소의 열악한 상황에서 좀 더 인간답게 살려 하다 고초를 겪는 한 사람의 삶을 기록함으로써 우리가 지향해야 할 보편타당한 인간의 길을 기억하게 한다.

서명숙과 안재성의 작품은 세상에서 잊힌 개인의 삶을 복원함으로써 시대와 역사를 생각하게 한다. 이런 면에서 이들은 점차 망각의 강에 빠져드는 우리 역사의 한 자락을 공동체의 기억으로 길어 올리려는 새로운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만하다. 두 사람의 작업은 거대 서사가 힘을 못 쓰는 시대에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환기시키는 의의를 지닌다. 여기에 더해, 다큐멘터리와 문학의 경계를 낮춤으로써 한국 소설의 외연을 넓히는 성과라는 의미도 갖는다. 문학의 기능과 범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넓힌다는 점에서 이 또한 중요하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문학평론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