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음악 창의도시 대구 .4] 한국 가곡·합창운동의 선구자 박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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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관영기자
  • 2019-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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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생각’ ‘가을밤’ 주옥같은 명곡 남긴 한국 근대음악 개척자

대구시 중구 동산동 청라언덕에는 박태준의 대표곡인 ‘동무생각’ 노래비가 자리해 있다. 박태준은 100여 곡의 동요와 50여 곡의 가곡을 남겼으며 ‘동무생각’은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이다.
대구 출신 음악가 박태준.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길 어두워질 때/ 엄마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부른다.’ 부르다 보면, 그렁그렁 눈물이 날 것만 같고, 가슴은 따스한 힘으로 가득 찬다. 이를 작곡한 이가 바로 금호(琴胡) 박태준(朴泰俊)이다. ‘가을밤’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이며 ‘동무생각’은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이다. 박태준은 100여 곡의 동요와 50여 곡의 가곡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우리의 말로 쓴 우리의 노래였고 그 노래들에 담긴 것은 우리의 정서였다.


계성학교 입학할 당시에는
음악재능보다 공부로 ‘두각’
독학으로 오르간 습득한 후
16세부터 교회 반주자 활동
‘가을밤’‘골목길’등 10여곡
그시절에 습작으로 만들어

대구 첫 민간합창단 만들어
‘성가협회’창단 연주회 열어
헨델·바흐 등 수많은 합창곡
광복후 국내 널리 알리기도
가곡·동요 등 많은 작품 남겨



#1. 최초의 동요 최초의 가곡

박태준은 1900년 11월22일 대구 남성로 157번지에서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박순조(朴順祚), 어머니는 오환이(吳煥伊)다. 포목상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대구 제일교회의 세례 교인이었다. 박태준은 제일교회의 오르간 소리와 찬송가를 들으며 자랐다. 1911년 대남소학교를 졸업하고 계성학교에 입학한 그는 음악보다는 공부를 잘 하는 아이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독학으로 오르간을 습득하고 16세 때는 제일교회 찬양대 반주자로도 활동할 만큼 음악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가을밤’과 ‘골목길’ 등 10여 곡이 이즈음 그가 습작으로 만든 곡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계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6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해 일본 경찰을 피해 대구로 피신하기도 했다. 1920년에는 계성학교 출신들을 중심으로 중창단을 조직했다. 김태술, 현제명, 권영하 등이 합세한 ‘교남4중창단(영남4중창단)’이다. ‘가을밤’ 등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 13편이 작곡된 때가 이때라고 알려져 있다. 숭실대학에서는 1920년부터 전도대를 조직하여 방학기간 전도 활동 및 애국 계몽운동으로서의 학생 활동을 펼쳤는데 ‘영남학생전도대’는 양지연을 대장으로 악사에 박태준, 현제명 등이 1921년에 약 1개월간 영남지역 일대를 돌며 전도활동을 하게 된다. 이때의 악사들이 바로 ‘교남4중창단’의 단원이다. 이들의 음악활동은 각 교회의 주일학교로 이어져 전국적으로 활성화되었다.

박태준은 1921년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의 창신학교에서 1년 반 동안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다. 창신학교는 노산 이은상의 선친이 설립한 학교이자 노산의 모교다. 이곳에서 박태준은 노산과 가까워진다. 1922년 두 사람이 함께 탄생시킨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 ‘미풍’ ‘님과 함께’ ‘소낙비’ 그리고 ‘동무생각’이다. ‘동무생각’의 처음 제목은 ‘사우(思友)’였다. 광복이 되어 중·고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사우’는 우리말로 풀어 ‘동무생각’이 되었다. 박태준은 1923년 노산의 고종사촌 여동생인 김봉렬과 결혼했다.

1925년부터 1931년까지 박태준은 모교인 계성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다. 1925년에는 12세 소녀 최순애의 동시에 곡을 붙인 ‘오빠생각’이 1925년 태어나고, 1926년 ‘맴맴’, 1927년 ‘오뚝이’ 등이 탄생했다. 1927년에 있었던 박태준의 작곡 발표회는 한국인이 한글로 된 노래를 처음 선보인 자리였고 작곡집이 대구서적조합에서 발간되었다. 1931년에는 제일교회 성가대의 지휘를 맡으면서 합창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동요곡집 ‘중중떼떼중’과 ‘양양범버궁’이 발간되었고 빅타음반에서 ‘오빠생각’ ‘사우’ ‘오뚝이’ ‘맴맴’을 취입했다.

#2. 한국 합창운동의 선구자

1932년 박태준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테네시주에 있는 터스컬럼 대학(Tusculum Collage) 문학학사 과정을 1년 만에 졸업하고 뉴저지의 웨스트민스터 콰이어 대학(Westminster Choir Collage)에 들어가 합창음악과 교회음악을 전공, 음악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임 생각’을 비롯한 몇 편의 가곡과 동요를 작곡했다. 귀국 후 그는 1936년 모교인 숭실전문학교에 교수로 부임했다. 학교는 신사참배 거부로 1938년 폐교되고 만다.

다시 대구로 내려온 박태준은 계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동시에 무영당백화점에 음악연구소를 개설하여 피아노, 오르간, 바이얼린 등의 악기와 작곡 등 일반 음악 이론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대구지역 최초의 민간 합창단인 ‘대구성가협회’를 창단해 창단연주회를 열었다. 이는 대구지역 합창활동의 뿌리가 되었다. 그는 계성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끝까지 머리를 깎지 않고 국민복도 잘 입지 않았으며 일본말도 하지 않아 친일파 교장에게 늘 잘못보였다’고 한다. 또한 ‘일본 당국으로부터 미국 유학을 갔다 온 자유주의자란 레테르가 붙어 주목받아 오다가 사소한 일에도 걸려서 진해 헌병대에 연행되어 갔다가 나중에는 부산 형무소로 넘겨져 장기간 옥고를 치른 일도 있다’ 고 한다.

광복 전 박태준은 서울로 자리를 옮겼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서울 남대문교회의 성가대를 맡는 한편 전문합창단인 ‘오라토리오합창단’을 창설해 창단연주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지휘한 곡이 헨델의 ‘메시아’로 이 곡은 당시 한국 초연이었다. 이로 인해 합창과 종교음악의 씨가 우리나라에 뿌려진다. 그는 헨델과 바흐 등 수많은 합창곡을 국내에 소개했으며 ‘오라토리오합창단’을 73년까지 이끌 만큼 열정을 쏟았다. 48년부터는 연세대 교수로 후학을 가르쳤고 55년에는 연세대에 종교음악과를 창설해 기독교음악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음악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초대학장 및 명예교수를 역임했고 52년에는 미국우스터대학에서 명예음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68년부터 71년까지 한국음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문화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상했다.

1974년 한국교회음악협회 고문직을 맡은 그는 아들이 있는 미국에 잠시 다니러 갔다가 건강 악화로 위를 3분의 1이나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한인교회합창단을 지휘하고 ‘교회음악사’와 ‘찬송가학’ 두 권의 번역서를 발간했다. 그는 8년만인 1982년 한국으로 돌아와 계속 성가대를 지휘했으며 귀국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는 가곡, 동요, 찬송가, 교가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연세대 교가와 경복중고 교가, 제헌절 노래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한국 음악계의 기초를 다진 선구자였다.

박태준은 1986년 10월20일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한국음악협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경기도 파주의 일산 기독교 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부인 김봉열 여사는 2002년에 별세했다. 부부는 슬하에 2남3녀를 두었다. 위로 은자·은보·송자 등 3녀, 그 아래로 남식·문식 두 아들이 있었다. 자녀 중에 음악의 대를 이은 이는 없다. ‘너무나 돈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고생이 심해서, 그래서 자식에게는 하나도 음악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손태룡, 한국 서양음악가 연구, 도서출판보고사, 2011. 손태룡, 대구의 전통음악과 근대음악, 영남대학교출판부, 2018. 김점덕, 한국 가곡사, 과학사, 198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클레멘타인·켄터키 옛집 등 창작 번역…제일교회에 혼성합창 성가단 처음 만들어
■박태준의 형 박태원


박태원은 박태준의 형이다. 그는 ‘이별가’와 ‘내사랑’ 등을 작곡하였으며 ‘클레멘타인’과 ‘켄터키 옛집’ 등을 창작 번역한 인물로 동생 박태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제일교회, 대남소학교, 계성학교로 이어지는 행보는 박태준과 나란하다. 이후 박태원은 1916년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음악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재학 중 그는 방학이면 대구로 내려와 계성학교 졸업생과 재학생에게 자신이 가사를 번역하고 창작했던 곡들을 가르쳤다. 1917년에는 제일교회에서 헨델의 ‘메시아’ 중 ‘할렐루야’를 혼성합창으로 지휘 발표했다. 남녀가 함께 같은 자리에도 앉지 못하던 시절에 박태원은 남녀 학생으로 구성된 혼성성가단을 조직했던 것이다. 1920년에는 연희전문학교 학생기독청년회가 주최한 자선음악회에 출연하여 그레이(Grey)가 작곡한 ‘파라다이스의 꿈’과 ‘저 멀리 티페레리’ 등을 불렀는데 당시 인기 성악가였던 윤심덕 이상의 호평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박태원은 1921년 8월5일 24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폐병이었다. 시인 이상화는 그의 죽음에 대해 ‘이중의 사망’이라는 시로 애도했다.

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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