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함양 개평마을 일두고택

  • 뉴미디어부
  • |
  • 입력 2018-12-28   |  발행일 2018-12-28 제36면   |  수정 2018-12-28
박석 내딛는 말발굽 소리, 돌담안 안사랑채 여인이 가장 먼저 듣고 나왔을까
20181228
솔송주문화관 정면으로 박석이 깔린 직선길이 뻗어 있다. 오른쪽 높은 담이 일두고택의 담장이다.
20181228
개평마을. 일두 정여창의 고향이자 함양을 대표하는 양반가 세거지다.
20181228
일두고택의 안채. 7칸 건물이 근엄하다. 대청의 깊숙한 곳까지 햇빛이 들어와 있다.
20181228
일두고택 사랑채. 누마루 앞에 석가산이 조성되어 있으며 왼쪽 문은 안채로 통한다. 일두고택 안사랑채 뒷담에 밖으로 통하는 무지개문이 비밀스럽게 나있다. (작은사진)

마을의 오래된 길은 천 따라 오르는 길. 길은 언제 단장을 했는가, 어쩌면 어제인가. 드문드문 좁은 돌계단이 천으로 내려서면 빨래하는 아낙과 물놀이하는 아이의 환영이 와락 피어오른다. 고샅길에는 차곡차곡 쌓인 무수한 돌의 담들. 어느 집 담벼락 위에는 강돌이 앉았는데, 그 옆에 앉은 작은 모과가 강돌인척 숨죽인다. 담 너머 처마 그늘에는 시래기가 바삭바삭 매달렸고, 망 자루에 잡혀 처마 끝에 내걸린 메주들은 햇살처럼 덩그렇다. 두꺼운 종이 이불을 덮고 누운 양파들은 슬쩍슬쩍 바깥이 궁금하고, 늙은 수세미는 빛 좋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쪼글쪼글 웃는다. 여행자의 한걸음 한 걸음을 가볍게 받들어주는 마을이다. ‘나는 한 마리 좀벌레.’ 이런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이가 어찌 저런 생각을 했을까. 그러니까 일두(一) 정여창(鄭汝昌) 선생 말이다.

두 물길 사이 평탄한 땅 자리한 ‘개평’
영남 대표 사림 정여창 고향, 세거지
100가구 기거, 전통한옥 60여채 보존
1644년 건립, 안채 남은 하동정씨 고가

마을 중심 정여창 생가자리 일두고택
효자·충신 집…솟을대문 위 정려 위엄
높은 기단위에 자리한 호방한 사랑채
400년 노송보다 더 옛사람의 산책로


◆개평마을

마을의 양쪽으로 두 물길이 흐른다. 북쪽에서 남쪽으로는 넓은 들을 가진 지곡천(池谷川)이, 서쪽에서 동쪽으로는 마을 집과 이웃한 평촌천(坪村川)이 흐르는데, 둘은 마을초입에서 만나 함께 남강으로 향한다. 두 물길 사이에 낀 평탄한 땅이라 하여 마을은 개평(介坪)이다. 경남 함양군 지곡면의 개평마을. 영남의 대표 사림이자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칭송되는 정여창의 고향이자 함양을 대표하는 양반가의 세거지다. 처음에는 김해김씨들이 살았다. 14세기에 정여창의 증조부가 이곳으로 오면서 하동정씨가 세거하게 되었고 이후 15세기에 풍천노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현재는 풍천노씨와 하동정씨가 대부분이다.

마을에는 100여 가구가 있는데, 60여 채의 전통 한옥이 보존되어 있다. 하동정씨 고가는 안채만 남아 있다. 마당에 지그재그로 선 커다란 향나무를 헤치고 들어가면 안채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상량문 기록으로 볼 때 1644년 건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오담고택(梧潭古宅)은 정여창의 12세 후손인 정환필의 집으로 종가에서 분가해 1840년에 지은 것이라 한다. 풍천노씨 대종가는 세조 때의 청백리 송재(松齋) 노숙동(盧叔仝)의 종가다. 그는 정여창의 고모집 사위로 1824년 이곳에 정착했다. 노참판댁 고가는 일제강점기 조선 바둑계의 국수라 불렸던 사초 노근영이 태어난 곳이다. 안채는 마을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 한다.

◆일두고택

길고 긴 돌담이 높다. 일두고택은 개평마을의 거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다. 1570년 정여창의 생가 자리에 지어졌고 이후 후손들에 의해 여러 번 중건되었다. 솟을대문 위에 정려가 5개나 걸려 있다. 효자와 충신의 집이다. 대문간의 규모는 그리 위압적이지 않으나 정려의 위엄이 무겁다. 넓게 비어 말끔한 마당에는 디딤돌들이 놓였다. 한쪽으로는 성큼성큼 사랑채로, 또 한쪽으로는 사뿐사뿐 안채로.

사랑채가 높은 기단위에 호방하다. 처마아래 눈썹 그늘진 매서운 눈처럼 ‘충효절의(忠孝節義)’ 글씨가 쏘아본다. 과도한 크기다. 거인이 그의 육중한 발로 심장을 짓누르는 느낌이다. 그 옆에는 ‘문헌세가(文獻世家)’ 편액이 걸려 있다. 누마루의 편액은 ‘탁청재(濯淸齋)’다. ‘마음을 맑게 닦는 곳’이다. 사랑채는 이 집안의 가풍과 정신을 소리친다. 노인의 눈물처럼 그 소리가 너무 크다. 사랑채 누마루 앞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조성되어 있다. 석가산의 휜 소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넓게 펼쳐 뒤편의 안사랑채를 가리고 있다. 안사랑채는 며느리에게 안채를 물려준 윗대 안방마님이 머물던 곳이다. 담장 가 곧은 전나무는 하늘을 뚫을 기세다.

사랑채의 왼쪽 문을 통과해 중문간채를 지나면 안채다. 정면 7칸 건물이 근엄하다. 대청의 깊숙한 곳까지 햇빛이 들어와 있다. 안채 뒤로는 사당과 곳간이 따로 구획되어 있고 곳간 옆 협문을 내려서면 안사랑채에 닿는다. 안사랑채 뒷담에 밖으로 통하는 무지개문이 있다. 일두고택 여인들은 이 문을 통과해 어디로 향했을까. 지금 문 밖은 개평마을 안내소다.

일두고택 앞에 ‘솔송주문화관’이 있다. 솔송주는 정여창 집안의 가양주로 성종에게 진상한 전통 명주라 전해진다. 집안에서 전해오는 이름은 송순주(松荀酒)다. 봄날의 연초록 소나무 순과 솔잎, 찹쌀, 그리고 지리산 암반수로 술을 빚는다. 술 빚는 일은 며느리들의 몫이다. 솔송주를 빚는 박흥선 명인은 정씨가문의 16대 손부로 경남 무형문화재 제35호다. 솔송주 문화관 정면으로 마을 중앙길로 향하는 고샅길이 넓게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왼쪽으로는 일두고택의 돌담이 머리위로 이어진다. 바닥에는 울퉁불퉁한 박석이 깔려 있다. 경건하고 조심히 출입하라는 것, 비가 올 때 신발을 적시지 않기 위한 것, 그리고 주인이 탄 말이 집으로 돌아오는 소리를 듣는 것. 말발굽 소리는 안사랑채의 주인이 가장 먼저 들었을 것이다.

◆일두 선생 산책로

냇가에 ‘일두선생 산책로’라 적힌 푯말을 따라 동산을 오른다. 동산 위는 의외의 평지다. 천변의 벼랑에 뿌리내린 노송 사이로 비늘 같은 기와를 인 집들이 내려다보인다. 저마다 번호표를 매달고 있는 노송들은 100여 그루, 수령 300년에서 400년으로 짐작된다. 지금의 소나무보다 일두선생이 더 옛사람이다. 그는 아주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고 한다. 한훤당 김굉필과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성종의 총애를 받아 동궁의 스승이 되었다. 동궁, 연산군이다.

동산의 윗길은 그리 길지 않다. 벼랑 위지만 위험하지 않고 무심하면서도 골똘하다. 동산을 가파르게 내려서면 동산우물이 하나 있고 오른쪽으로 산책로가 이어진다. 급히 오르며 굽어지는 길가에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개평리 소나무 37번’ 번호를 달고 있다. 마을의 동쪽 구역이 훤하다. 소나무 아래에 놓인 산책로 푯말을 따라 계속 나아간다. 곧 양쪽으로 나대지와 논밭을 거느린 길이 먼 산을 향해 아주 천천히 오른다. 둘러선 세상이 너무 넓어서 코끝이 찡하다. 그리고 끝이다. 길은 이어지나 더 이상 안내 푯말은 보이지 않는다.

연산군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1498년 무오사화 때 함경도로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일두는 정여창이 스스로 지은 호다. ‘한 마리 좀벌레’란, 세상을 꿰뚫어 본 이의 자기모멸이었을까. 자신을 한없이 낮춘 어른의 품성이었을 게다. 밭에 고인 물에 살얼음이 반짝인다. 쨍한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살얼음 아래 맑은 물에 하늘이 출렁인다. 새들이 날아오른다. 한해가 끝나간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88고속도로 광주방향으로 가다 함양IC로 나가 24번 국도 지곡 방향으로 북향한다. 지곡교를 건너 오른쪽에 지곡치안센터가 보이는 곳에서 바로 왼쪽으로 들어가면 개평교 건너면서 마을이 시작된다. 큰길 따라 계속 가면 개평마을 안내소와 주차장이 있으며 곳곳에 안내판이 잘 되어 있다. 마을 내에 식당과 숙박시설이 여럿 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