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36] 성주 포천구곡(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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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봉규기자
  • 2018-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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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학통 이어받은 이원조, 만년에 벼슬 버리고 가야산 계곡 은거

이원조가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며 만년을 보낸 만귀정(晩歸亭). 포천구곡의 9곡 근처에 있다.
포천구곡을 그린 포천구곡도 중 제1곡(오른쪽)과 제2곡.
성주 포천구곡(布川九曲)은 응와(凝窩) 이원조(1792~1871)가 성주군 가천면 화죽천에 설정한 구곡이다. 이원조의 학통은 입재 정종로와 정종로의 스승인 대산 이상정,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퇴계 이황으로 연결된다.

이원조는 18세에 문과에 급제해 권지승문원 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한다. 그 후 강릉대도호부사, 제주목사, 경주부윤 등 지방 수령을 지내며 민생 안정과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상당한 치적을 남겼다. 만년에 경주부윤을 그만두고 가야산 아래 만귀정을 짓고 은거하며 지내다가 생을 마쳤다.

그는 만귀정 은거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응와선생문집’에 나오는 내용이다.

18세에 문과 급제 응와 이원조
평소 세속적 명성·이익 멀리해
모범적인 학자관료 전형 보여줘
성주 가천 화죽천에 구곡 설정
만귀정 짓고 지내다가 생 마감
포천구곡시·포천도지 등 남겨


‘나는 일찍이 벼슬길에 나갔으나 재주가 적고 능력이 많지 않았다. 스스로 많은 사람이 달려가는 곳을 잘 살펴서 매번 머리를 숙이고 한 걸음을 물러날 줄 알아 감히 명예를 다투고 이익을 취하는 계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요행히 벼슬에 나아가 당상관의 품계와 지방관의 관직에 이르니 이미 분수에 넘치고, 나이가 너무 많아 모든 방면에서 가진 뜻이 권태로워 산수의 사이에 소박한 집을 지어 여생을 보내고자 했다. 마침내 쌍계(雙溪)를 버리고 포천에 들어가니 그 출처(出處)에 한결같이 머리를 숙이고 걸음을 물려서 사람과 다투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사람들이 맛보지 못하는 것을 맛보니, 얕은 것이 깊은 것 못지않고 작은 것이 큰 것 못지않은데 하물며 그 산의 그윽함과 물의 청정함과 돌의 기이함이 뒤지지 않거나 더 나음에 있어서랴.’

그는 일찍 벼슬길로 들어서 여러 관직을 맡으며 승진도 했으나 세속적인 명성과 이익을 탐하는데 빠지지 않았다. 그는 63년 동안 벼슬하면서도 항상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마음자세를 지녔다. 모범적인 학자 관료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원조가 주자를 본받아 가야산 계곡에 설정한 포천구곡

이원조는 비록 벼슬길에 올랐으나 자신의 본령은 학문에 있음을 늘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자신이 좋아하는 자연으로 돌아가 학문과 더불어 생을 마감할 생각을 잊지 않았다. 그랬던 그는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1851년 마침내 가야산 북쪽 포천계곡 상류에 만귀정을 짓고 은거했다.

이원조는 이렇게 남들이 맛보지 못한 것을 맛본 포천에 주자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포천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했다. 그가 설정한 구곡의 명칭은 1곡 법림교(法林橋), 2곡 조연(槽淵), 3곡 구로동(九老洞), 4곡 포천(布川), 5곡 당폭(堂瀑), 6곡 사연(沙淵), 7곡 석탑동(石塔洞), 8곡 반선대(盤旋臺), 9곡 홍개동(洪開洞)이다.

그는 ‘제무이도지후(題武夷圖誌後)’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무이산은 천하의 명산이다. 주자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그 시를 많이 화운(和韻)하고 그 땅을 그림으로 그리고, 또 글로 기록했다. 내가 일찍이 수도산(修道山)에 정자를 지어서 망령되이 고인을 사모하는 뜻을 두고 구곡을 모방하려고 구곡시에 화운하였다.’

이원조는 이처럼 다른 많은 선비처럼 주자의 무이구곡을 따라 가야산 포천계곡에 포천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하면서 포천구곡시를 짓고 포천구곡도를 그렸다. 그리고 포천구곡가를 비롯해 제자들과 함께 만귀정의 풍경을 읊은 시 등을 수록한 ‘포천지’를 남기고, 포천구곡도 그림을 그려 엮은 ‘포천도지(布川圖誌)’를 남겼다.

이원조는 또한 무이구곡도와 함께 무이구곡과 관련 있는 선인(先人)들의 글을 엮어 ‘무이도지’를 만들기도 했다. 이황, 정구, 정종로가 쓴 무이구곡 차운시, 이상정의 구곡도 발문 등을 실었다.

◆이원조의 포천구곡시

이원조의 포천구곡시 ‘포천구곡차무이도가’는 다음의 서시로 시작된다.

‘가야산 위에 선령이 자리하고 있어(伽倻山上有仙靈)/ 산은 절로 깊고 물은 절로 맑다(山自幽水自淸)/ 산 밖에 노니는 지팡이 이르지 않아(山外遊曾未倒)/ 달은 밝고 생학 소리만 들을 뿐이네(月明笙鶴但聞聲).’

1곡은 법림교다. 이원조는 ‘포천산수기’에서 법림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고을에서 30리쯤 가면 장산(獐山)에 이르는데 위쪽에서 나뉜 물이 다시 합쳐지는 곳으로, 하류에는 한강대와 봉비암이 있으니 바라보면 마치 그림과 같다. 장산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법림교에 이른다. 이곳이 산으로 들어가는 제1곡이다. 법림교 동쪽 수 리쯤에 아전리(牙田里)가 있는데 시내가 사현(沙峴)에서부터 내려와 폭포가 되니 매우 기이하다. 내가 처음에는 그 위에 정자를 지으려고 하였으나 좁아서 그만두었다. 법림교 서쪽으로 시냇물 따라 길이 있으니, 포천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일곡이라 모래 여울 배 띄울 수 없고(一曲沙灘不用船)/ 법림교 아래서 맑은 시내 시작되네(法林橋下始淸川)/ 유인이 이곳에 원두를 찾아가는데(遊人自此尋源去)/ 골짜기 가득한 무지개 빛 저녁 연기 끄네(萬壑虹光拖夕烟).’

법림교를 읊고 있다. 배를 띄울 수 있는 계곡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배를 타고 산수를 구경하며 유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도를 찾아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源)’은 ‘원두(源頭)’를 말하는데,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 나오는 표현으로 샘의 원천, 도의 원천을 의미한다.

길을 나서며 앞을 바라보는데 골짜기에 무지갯빛 저녁 안개가 덮여 있다고 표현한 것은 도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도 1곡 지점에는 다리가 놓여 있으나 다리 이름은 법림교가 아니라 아전촌교이다. 근처에 아전촌이 있다. 하지만 1곡 아래에 법림동이 있어 과거에는 다리 이름을 법림교라 한 까닭을 알 수 있다.

아전촌교 아래로 흐르는 시내가 화죽천이다. 화죽천은 증산에서 발원해 동남으로 흐르면서 포천계곡을 관통하는데 이 굽이에 이르러 아름다운 풍광을 이룬다. 화죽천은 이 굽이를 지나서 대가천에 흘러든다.

‘이곡이라 조연 가엔 봉우리 솟아 있고(二曲槽淵淵上峰)/ 봉우리 위에 선돌은 신선의 모습이네(峰頭石立羽人容)/ 동문(洞門)의 한 길은 그야말로 실과 같은데(洞門一逕如線)/ 물과 산이 돌아가니 푸르름 몇겹인가(水復山回翠幾重).’

2곡 조연이다. 2곡에 대해 이원조가 기록한 내용을 보면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제2곡을 조연이라 한다. 돌이 파인 것이 구유와 같고, 물이 맑은 것이 구슬과 같다. 피라미가 오가며 헤엄을 치는데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1곡에서 500m 정도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 2곡이다. 지금은 지형이 변해 구유 모양을 한 못을 쉽게 찾을 수는 없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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