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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음악 창의도시 대구 ,3]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그리고 근대음악의 중심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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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관영기자
  • 2018-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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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향 ‘대구 최초 음악감상실’…오리엔트 레코드 ‘옛가요·가수의 산실’

대구시 중구 향촌동 향촌문화관 지하에는 1946년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고전음악감상실 녹향이 자리해 있다. 음악 연주와 감상이 함께 이뤄지던 녹향은 광복과 6·25 전후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녹향 음악감상실 뒤편에 현제명, 권태호, 하대응 등 대구를 대표하는 근대 음악인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향촌문화관 2층 상설전시실에는 1950년대 대중음악의 요람이었던 오리엔트레코드사 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다.

피아노의 유입 이후 대구에는 관악기가 도입된다. 1908년 천주교 소속 성립학교에서 창설된 ‘신호나팔대’가 그 시작이었다. 이 흐름은 1910년 국권피탈 이후 브라스밴드 문화로 이어진다. 1912년 계산성당에서 ‘명도회악대’가 조직되었고 1917년에는 ‘계성학교악대’가 관악 활동을 시작했다. 종교적 활동으로 연주되었던 이들 악기는 점차 일반화되었고 이후 악기를 통한 전공자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특히 대구사범학교에서 펼쳐졌던 관현악 공연은 한국 관현악 무대의 효시가 된다. 이때가 1920~30년대다. 이 시대 음악 창작에 있어 주목되는 것은 동요와 가곡의 개척이다. 개인의 고통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동심을 노래한 이러한 곡들은 일제의 억압과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우리말로 된 우리 노래라는 점에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매개로 작용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동요·가곡 등 처음 등장
대구출신 박태준 등 활발하게 활동
‘오빠생각’‘고향생각’ 지금도 애창

50년대 전국 주름잡았던 대중 음악
대구로 피란 온 음악인들의 역할 커
남인수·백년설·백설희·나애심 등…
오리엔트사엔 당대 최고 가수 소속
교동시장 강산면옥서 점심 먹은 후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를 만들기도


#1. 일제강점기의 대구 음악

1920년 대구 출신 박태준은 ‘가을밤’ ‘꽃봉투’ ‘가을’ ‘꼬부랑둔덕’ ‘고기잡이 할아버지’ ‘골목길’ ‘꽃밭’ ‘나비와 잠자리’ ‘내 방패 연’ ‘눈 꽃’ ‘눈이 오는 밤’ ‘물새’ ‘우리나라 기’ 등 13편을 작곡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다. 이후 1923년 도쿄에서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색동회’가 조직되면서 본격적인 동요 창작이 이루어졌다. 이 무렵 박태준은 오늘날에도 널리 애창되고 있는 ‘오빠생각’ ‘오뚜기’ ‘맴맴’ 등을 작곡했다. 일제강점기의 동요는 ‘조선의 어린이를 위해 어린이의 심성에 맞게 조선 사람이 만든 신식노래’였다. 한국동요는 당시 우리 민족의 감정과 시대적 정서에 융합되어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즐겨 불렀으며 30년대에 활성화되면서 하나의 장르로 정형화되었다.

윤복진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하던 작사가다. 그는 ‘종달새’ ‘바닷가에서’ ‘잠자는 미륵님’ ‘은행나무 아래서’ ‘소낙비’ 등 수많은 동시를 지었으며 박태준과 홍난파 등이 곡을 붙였다. 윤복진은 제일교회 성가대원, 계성학교 합창부원으로 활동했으며 박태준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든 동요는 대구 중구 서성로에 있던 무영당(서점 및 백화점)에서 1929년 ‘중중떼떼중’, 1931년 ‘양양범버궁’ 등의 책으로 발간되었다. 무영당 주인 이근무는 백화점 2층 한쪽에 대구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을 제공했는데, 윤복진과 박태준은 그곳에서 함께 작업했다고 한다. 계성학교 재학시절부터 동요를 발표했던 김성도는 문학적 재능과 음악적 소질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가 1934년에 작사 작곡한 ‘어린 음악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동요가 되었다.

192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 4편이 발표되었다. 이은상의 시에 박태준이 곡을 붙인 ‘미풍’ ‘님과 함께’ ‘소낙비’ 그리고 ‘동무생각’이다. 당시에는 ‘가요(歌謠)’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했으며 건전하고 예술적인 노래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1927년에는 박태준의 가곡집이 대구서적협회에서 출간되었고 1939년에는 ‘물새발자옥’이란 작품집을 내놓기도 했다. 현제명은 1932년 ‘현제명작곡집’ 제1집을 통해 ‘가을’과 ‘고향생각’ 등을 발표했다. 1930년대부터 우리나라의 가곡은 청중에게 상당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음악에서 예술성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더불어 가곡에서 나타나는 애상감과 비애감 등을 우리 고유의 정서로 느끼게 된 것이다. 또한 1930년대는 음반과 방송 등 새로운 전달매체가 등장하면서 보급 면에서도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바리톤 김문보, 테너 현제명과 권태호의 음성과 박태준과 윤복진, 김성도의 음악 등이 유성기 음반에 담겼다. 이는 오늘날까지 소중한 기록유산으로 남아 있다.

개인뿐만 아니라 계성찬양대, 동산합창대, 대구현악단, 대구사범학교관악단, 대구합창협회 등 많은 음악 단체의 활동도 활발했다. 음악 공연장으로는 대구극장, 대구제일소학교 강당, 만경관, 대구공회당 등이 있었고, 음악 단체의 활동은 수많은 단체들의 후원 및 주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대구에는 경산기독청년회, 계성학교교우회, 대구청년동맹, 대구청년회 등 32개에 달하는 단체가 있었는데 음악회를 개최한 이러한 일반단체가 음악회 숫자보다도 많았다.

‘앞으로는 비슬산 뒤로는 팔공산, 그 복판을 흘러가는 금호강물아, 쓴 눈물 긴 한숨이 얼마나 쎗기에, 밤에는 밤 낮에는 낮 이리도 우나.’ 1930년 발표된 이상화의 ‘대구행진곡’이다. 그는 이미 1926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 바 있었다. 이와 같은 민족적인 시가 잡지를 통해 발표되자 일제는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를 꾀한다. 1932년 ‘대구행진곡’과 ‘대구소패’, 1935년 ‘대구부민가’가 대구 전역에 울려 퍼졌다. 일본인이 쓰고 일본인이 부른 일본풍의 노래였다. 각 지역의 행진곡과 소패(일본의 민속적 노래)의 보급은 전국적으로 이행되었다. 이후 일제는 문화말살정책을 강력하게 펼친다. 모든 한국어 신문과 모든 한국어 잡지를 폐간시키고 한국인의 성명말살과 창씨개명을 강행했다. 1940년대 들어 동요는 더 이상 창작되지 못했고 부를 수도 없게 되었다. 광복 이후 윤복진은 대구 병상에서 ‘초등용가요곡집’을 펴냈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어린이들이 일본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이 책을 펴낸다’고 밝혔다. 이후 윤복진은 월북하여 우리에게 잊힌 이름이 되었다.

#2. 광복과 6·25전쟁 당시 음악

광복이 되자 대구의 음악인들은 다양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신생악우회와 대구합창협회, 전시작곡가협회 등이 조직되었고 대구경찰악대가 창단되었다. 권태호, 김형노, 박은용, 고태국이 독창회를 가졌고 평양음악대학을 다녔던 전문 작곡가 박재강은 대구음악연구소를 이끌었다. 권태호는 대구음악학원을 열었고 1949년에는 ‘국민가요집’을 발간했다. 대구미공보원과 예육회, 영남음악연구회 등에서는 레코드 감상회를 개최하였다. 음반을 통한 감상회 활동은 세계적인 대가의 음악을 접하는 통로로서 대구지역의 음악활동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감상회는 연주자들의 연주활동이 활발해지는 70년대까지 지속되면서 예비음악가들에게는 전문 음악가로의 꿈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고 사회 전반적으로는 음악 문화의 토양을 다지는 밑거름이 되었다.

194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전음악감상실이 문을 열었다. 이창수가 향촌동 지하에 마련한 ‘녹향’이다. 녹향은 대구현악4중주단의 연주회, 김진균 작곡 발표회 등의 연주공간이 되기도 했고 예육회의 음악 감상 모임의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1947년 1월1일에는 백조다방이 문을 열었다. 백조는 ‘생상’의 ‘동물의 사육제’에 나오는 백조에서 딴 이름이었다. 주인 이삼근은 아들인 피아니스트 이공주를 위해 다방에 그랜드피아노를 마련해 두었다. 이로 인해 백조다방은 유명 문화예술인들의 모임장소가 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피란지 대구는 한국 음악의 중심이 된다. 정훈군악대, 제3사단군악대, 육군본부군악대 등이 활동하였고 제6연대군악대, 공군군악대 등 여러 군악대가 창단되었다. 대한 심포니가 창립되어 박재강의 교향적 합창곡 ‘농악의 인상’이 초연되었고 현제명의 오페라 ‘춘향전’이 공연되었다. 대구합창협회, 대구가톨릭합창단, 서울가톨릭합창단 등의 음악회, 한국교향악단의 연주회, 육군군악대연주회 등이 연일 이어졌다.

권태호는 6·25전쟁동안 ‘무찌르자 오랑캐’ ‘호국의 노래’ 등 많은 군가를 작곡했다. 전시작곡가협회에서 주관한 윤용하 작곡발표회와 김진균 작곡발표회는 초기 가곡과 동요의 스타일을 벗어난 전문적인 작곡활동의 시발점이었다. 1952년 이점희를 중심으로 발족된 영남음악연구소는 훗날 대구음악가협회로 확대된다. 또한 효성여대의 설립과 음악과가 개설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계명대와 경북대, 영남대 등이 클래식 교육문화를 이끌게 된다. 1953년에 설립된 세광출판사는 대중가요집을 만들어 보급했다.

녹향과 백조다방을 비롯해 향촌동과 동성로 등에 포진해 있던 향수다방, 호수다방, 르네상스, 곤도주점 등은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다. 1950년대부터 1961년까지 ‘녹향시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이들이 녹향을 들락거렸다. 당시 종군기자였던 시인 양명문이 녹향의 탁자에 써내려간 시에 변훈이 곡조를 붙인 것이 가곡 ‘명태’다. 백조다방은 권태호와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 ‘노래의 날개’와 ‘금잔디’를 작곡한 김진균 등 많은 음악인의 사교장이 되었고 효성여대나 계명대 음대 학생들의 연습공간으로 애용되었다. ‘가고파’의 작곡가 김동진은 르네상스의 터줏대감이었다. 이 시절 외신기자들은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흐른다’고 하였다.

1947년 이병주가 설립한 ‘오리엔트 레코드사’는 한국 음반시장이 최악의 침체기를 겪는 동안 대구로 피란 온 인재들을 영입해 우리나라 가요의 맥을 잇는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오리엔트 사에 속한 작곡자는 박시춘, 이재호, 손목인, 이병주, 이인권, 엄토미 등이었고 작사가는 강사랑, 손로원, 김다인, 손석우 등이었다. 전속가수로는 남인수, 백년설, 현인, 백설희, 나애심 등이 있었다. 51년 여름 박시춘과 강사랑, 현인은 교동 양키시장의 강산면옥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악상을 떠올린 박시춘은 ‘오리엔트 다방’(자유극장 옆 남선악기 2층)으로 강사랑과 현인을 끌고 올라간다. 다방 한 구석에 군용 담요를 두세 겹 엮어 방음장치를 해둔 곳이 ‘오리엔트 레코드사’였다. 이날 탄생한 노래가 ‘굳세어라 금순아’다. 오리엔트 레코드는 총 80~90매의 음반을 발매, 160~170여 곡을 발표했다. 그 중 ‘비 내리는 고모령’ ‘신라의 달밤’ ‘전우야 잘 자라’ ‘태극기’ ‘전선야곡’ ‘아내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미사의 노래’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럭키 서울’ 등은 가요의 전설이 되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손태룡, 대구의 전통음악과 근대음악, 영남대학교출판부, 2018. 손태룡, 대구지역 작곡활동의 흐름,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 음악논단 Vol.9, 1995. 원종찬, 일제강점기의 동요, 동시론 연구, 한국아동문학연구 제20호, 2011.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근대로의 여행, 대구시 중구청, 2015. 한국콘텐츠 진흥원 문화콘텐츠 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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