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음악 창의도시 대구 .2] 사문진 나루 통해 들어 온 피아노

  • 박관영
  • |
  • 입력 2018-12-20   |  발행일 2018-12-20 제15면   |  수정 2018-12-24
낙동강 짐배 타고 온 ‘귀신통’…대구 서양음악의 시작이었다
20181220
1900년 3월 대구 달성의 사문진 나루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가 들어왔다. 이는 대구에 근대 서양음악이 전파되는 계기가 됐다. 피아노가 처음 들어온 사문진 나루터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피아노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20181220
사문진 나루터에 조성된 피아노 조형물.
20181220
선교사 사보담 부부의 피아노는 짐배를 타고 낙동강을 거슬러 달성 사문진 나루에 도착해, 대구 집까지 옮겨졌다. 당시 사문진 나루는 낙동강 상류와 하류를 오가는 뱃길의 중심지였다.

우리나라 전통 음악에 새로운 서양 음악이 유입되어 수용, 발전된 계기는 천주교와 개신교가 들어오면서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된 찬송가는 우리나라에서 불려진 최초의 서양노래였다. 대구에서는 계산성당이 설립되기 이전부터 성가가 불려졌고, 1897년 제일교회가 설립되면서 찬송가가 불려졌다. 이와 함께 주목된 것이 반주로 사용된 손풍금과 오르간, 그리고 피아노다.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는 대구지역 제5대 선교사였던 리처드 헨리 사이드보담(Richard H. Sidebotham, 한국명 사보담)과 에피 엘든 브라이스(Effie Alden Bryce) 부부의 피아노였다. 당시 피아노는 태평양을 건너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지금의 대구 달성 사문진 나루터에 내려졌다. 최초의 피아노, 그것은 ‘신비한 문명’이라 일컬어지며 이후 대구는 물론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을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1. 사보담과 에피 부부의 이주

사보담은 영국 런던 북부 비글스웨이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은 감리교 목사였고, 1883년 가족과 함께 미국 미시간주 레이크시티로 이주, 북장로교 목사로 활동했다. 사보담은 1890년대 후반 미시간 알마 대학과 뉴저지 프린스턴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899년 5월 미시간주 새기노 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 달 미시간주 래피어에 사는 에피와 결혼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도 장로교 목사였다. 에피는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맡았고 마을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며 생활했다. 그해 9월6일, 부부는 조선의 대구 선교지부 선교사로 발령받게 된다.


사보담 선교사 부부의 최초 피아노
선교목적으로 가져와 찬송가 반주
서양음악 한국에 알리는데 큰 역할
당시 사문진서 대구 종로까지 40리
짐꾼들이 상여 매듯 3일만에 옮겨

1901년에 같은 경로 통해 대구 온
두번째 피아노는 신명여학교 기증
학교에서의 음악교육 처음 시작돼
양악1세대 교회·선교사의 역할 커



부부는 9월28일 집을 떠나 10월1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호놀룰루, 일본 요코하마, 고베, 히로시마를 거쳐 11월20일 오전 9시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조랑말을 타고 대구로 향했다. 사흘 뒤 대구에 도착한 그들은 먼저 부임한 3대 대구선교사 존슨 부부의 집에서 2개월간 머물다 그들의 사역지인 종로(현 약전골목) 제일교회 인근 초가집에 안착했다. 그때 부부의 이삿짐은 태평양을 건너는 중이었고, 그 속에는 에피의 커다란 피아노가 있었다. 사보담은 1899년 12월29일 일지에 초가집의 내부 구조를 그리고 피아노를 놓을 위치를 정해 두었다. ‘모든 문이 낮아 서서 드나들 수가 없다. 피아노를 놓을 수 있는 공간이 딱 한 군데 있는데… 왜 피아노를 (들여) 놓을 창문이나 벽면이 단 5피트(약 150㎝)도 없는 걸까. 아 이 멋진 한국식 집이여!’

#2. 상여를 들 듯 대구로 옮겨

1890년대 영남지역 복음 전파를 위해 부임한 선교사들의 운송 수단은 낙동강 물길을 이용한 짐배였다. 당시 대구 달성의 사문진 나루는 낙동강 상류와 하류에서 모여든 장삿배가 집결하고 수많은 보부상이 드나들던 영남지역 물류의 중심지였다. 사문진 나루를 통해 들어온 물자는 대구를 비롯해 강원과 호남 등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부산에 도착한 에피의 피아노는 짐배를 타고 낙동강을 거슬러 1900년 3월 달성의 사문진에 도착했다. 피아노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보담은 깔개, 로프, 망치 등을 가지고 인부 20여명과 함께 사문진으로 갔다. ‘사문에 도착하자 피아노는 강변에 있었다. 배에서 내리려면 엄청난 고생을 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매우 감사했다. 그때까지 피아노가 물에 묻지 않도록 잘 보관돼 있었다.’ 사문진에서 대구 종로 집까지는 40리(16㎞)길이었다. 이 육중한 피아노를 어떻게 옮길 것인가. 사보담이 미리 고안해 둔 방법은 ‘상여’와 같은 형태였다.

‘짐꾼들은 새끼줄을 만들었는데 두께 2인치(5㎝), 길이 50피트(15m)의 줄 3개였다. 우리가 가져온 길이 14피트(420㎝) 짜리 상여용 막대 2개를 피아노 양 옆으로 땅에서 1피트(30㎝) 높이로 위치시켰다. 그리고 가로막대 5개를 새끼줄로 고정시켜 견고한 운반대를 만들었다.’ 피아노는 폭 330㎝의 운반대 위에 올려졌고, 인부들은 상여를 매듯 피아노를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삿일이 아니었다. ‘주변 집들에 큰 소리를 내며 부딪쳤고’ ‘보리밭 위를 쿵쾅거리며 지났고’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구덩이나 도랑, 연못을 건넜고’ ‘진창 논을 잘 피해야 했으며’ ‘상점들의 물건을 넘어뜨리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사람들은 피아노를 ‘귀신통’이라 불렀다.

피아노는 3일 만에 대구 집에 도착했다. 문틀을 뜯어내고서야 피아노를 집 안으로 들일 수 있었다. 대장정을 마친 피아노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제자리에 있는 건반은 하나도 없었다. ‘저는 (건반) 조각들을 모아 조립법을 연구했는데 (다행히) 딱 두 건반만 망가져 있었죠. 드디어 첫 피아노 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졌습니다. 피아노 조율은 아주 잘 되었고, 저희는 아주 즐겁게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이에요.’ 피아노 운반 과정은 사보담이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 1900년 3월 편지 내용에서 확인된다. 편지에서 그는 3월26일에서 28일까지 3일간 피아노를 옮기는 과정을 매우 상세하게 밝혔다. 부부는 피아노가 도착하자 어린이 성경공부방을 열고 피아노 반주로 찬송했다. 아이들이 구름떼처럼 몰렸다.

사보담 부부는 대구에서 1년간 근무한 뒤 부산지부로 옮겨 1907년까지 활동했다. 이후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이듬해 12월3일 가스 폭발사고로 세상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의 피아노는 사보담이 미국으로 돌아갈 당시 부산까지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국 최초의 피아노는 8년 동안 한국에 머물다 미국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라 여겨지고 있다.

#3. 양악의 발전

사보담 부부의 피아노가 대구에 들어온 이듬해인 1901년, 선교사 존슨의 아내인 파커의 피아노가 대구에 도착했다. 파커의 피아노는 에피의 피아노와 같은 경로를 통해 들어와 중구 동산에 있는 집으로 옮겨졌다. 이후 파커는 피아노 교육을 시작했다. 1900~1910년 무렵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운 사람은 조선에서 에피와 존슨의 아내 파커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1906년 계성학교와 1907년 신명여학교가 제일교회를 바탕으로 설립됐다. 파커는 자신의 피아노를 신명여학교에 기증했고, 피아노를 통한 ‘학교에서의 음악교육’이 대구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개교한 당시에는 ‘합동찬송가집’을 비롯한 단순한 미국노래 몇 곡을 부르는 정도였다. 그것은 근대지향의 양악으로서는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점차 그 기반을 확대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나라 양악 1세대들은 거의 교회를 통해 서양음악을 익히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교회와 선교사의 역할은 컸다. 선교사와 음악가의 결합을 통해 서양음악의 본격적 수용과 재생산이 일어나게 된다.

남녀 혼성 합창의 창시자인 박태원은 대구의 제일교회(남성정교회)에 다니면서 서양음악에 관심을 가졌다. 한국인 최초의 바리톤 김문보는 아버지가 초기 제일교회 장로였다. 그는 종교적 환경 속에서 자라나 전문적으로 공부해 성악가가 되었다. 합창운동의 선구자이자 ‘동무생각’을 작곡한 박태준 역시 제일교회와 형 박태원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계성학교를 다니면서 독학으로 오르간을 습득했다. 안동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악을 전공한 권태호는 박태준의 초청으로 1928년 7월8일 대구소학교(옛 중앙초등학교)에서 대구 최초의 독창회를 가졌다. 독창회의 피아노 반주는 박태준이 맡았다. 권태호는 광복 직후 대구에 정착해 대구 음악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대구에서는 1910년대부터 전문 음악인이 배출되었고, 다양한 음악 단체들이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지금의 종합예술은 이러한 환경에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사문진나루터에서는 2011년부터 매년 피아니스트 100명을 초청해 ‘달성 100대 피아노’ 축제를 열고 있다. 1900년 3월 미국 미시간주에서 배송된 사보담 부부의 이삿짐 속 피아노가 부산 낙동강 하구에서 짐배를 통해 대구 사문진나루터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다. 한국에 피아노가 들어온 지 118년이 됐고, 이는 대구에 근대 서양음악이 전파되는 첫발이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손태룡, 사문진과 한국 첫 피아노, 민속원, 2015. 손태룡, 대구의 전통음악과 근대음악, 영남대학교출판부, 2018. 한국콘텐츠 진흥원 문화콘텐츠 닷컴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