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칠레 산티아고

  •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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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14   |  발행일 2018-12-14 제37면   |  수정 2018-12-14
독재 어두운 역사 ‘기억’…실종된 시민 인권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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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스 광장. 왼쪽이 산티아고 대성당, 중앙에 보이는 건물이 중앙우체국, 옆의 첨탑 건물은 국립역사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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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론소 라우타로 석상을 배경으로 힙합 공연을 하는 젊은이와 관객들.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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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대성당 내부. 천장의 성화가 특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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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의 인기를 끄는 파티오 벨라비스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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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 콜롬비아노 박물관의 전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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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집 ‘라 차스코나’.

칠레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날씬한 나라다. 남위 18도에서 56도까지 뻗친 남북의 길이는 무려 4천329㎞다. 반면 태평양과 안데스 산맥 사이의 동서 폭은 175㎞에 불과하다. 그래서 칠레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사막에서 얼음으로 뒤덮인 극지방까지 모두 품고 있다. 산티아고는 칠레의 수도다. 칠레 중앙부 450~650m의 고지대에 위치한 이 도시는 1541년 에스파냐의 정복자 페드로 데 발디비아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지진이나 홍수, 대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지만 굳건히 오늘날 칠레를 대표하는 도시로 성장했다.

볼리비아 최남단과 국경을 접한 칠레 산페드로 데 아타카마에서 산티아고까지는 1천630㎞, 버스로 24시간을 가야 했다. 버스를 24시간이나 타야 하다니 걱정이 앞섰다. 24시간 동안은 이 버스가 호텔이다. 단단히 마음 먹고 아예 잠자는 복장으로 무장을 했다. 다행히 화장실이 딸린 커다란 2층 버스는 우리의 우등고속버스처럼 좌석이 편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조금 지나자 남자 승무원이 저녁 서비스를 시작했다. 기내식처럼 제법 근사했고 와인까지 곁들였다. 포만감에다 알코올까지 가세하자 일순 긴장이 풀렸다. 이제야 찬찬히 버스 안을 살펴보니 각양각색의 승객들이 나름의 복장과 포즈로 긴 여행을 대비하고 있었다. 갑자기 이 버스가 정겨워졌다. 칠흑같은 밤거리를 관통하는 버스 차창 너머로 간혹 묻어 있는 불빛들에 시선을 쫓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보다. 한참 만에 눈을 뜨니 다시 승무원이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12시간을 더 달렸지만 그렇게 내 생애 가장 길었던 버스여행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이 났다.

칠레 중앙부 450∼650m 고지대 수도
도시 중심이자 관광지 아르마스 광장
두개의 첨탑과 아름다운 성화 대성당
우체국·대통령 관저 모네다 궁 에워싸
정복자·원주민 전사 상징물 한곳 공존

200년 넘는 역사 남미 최고 국립도서관
중남미 최초 노벨문학상 배출 구심점
스페인 점령전 문화예술 박물관 인상적
20세기 위대한 저항시인 네루다의 집
시민의 분노·탄식‘기억과 인권 박물관’


이른 저녁을 먹고 버스에 시달린 몸을 달래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산티아고의 중심이자 관광지가 몰려 있는 아르마스 광장을 찾았다. 이 광장은 역사적 명소인 산티아고 대성당, 산티아고 중앙우체국, 산티아고 최고법원이었던 칠레 국립역사박물관, 대통령 관저인 모네다궁을 비롯해 관공서와 옛 시의회 건물 등으로 에워싸여 있다. 거리 곳곳에 유럽식 카페가 자리하고, 다양한 길거리 공연이 열려 연중 시민들과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광장을 광장답게 만드는 것은 정복자와 원주민의 두 상징물이다. 1541년 거센 원주민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산티아고를 세운 정복자 발디비아 장군의 기마상과 마푸체족 독립운동 지도자의 석상 알론소 라우타로 석상이 그것이다. 정복자의 동상과 정복자에 맞선 원주민 전사의 동상이 공존하는 이곳이야말로 광장의 의미가 가장 잘 살아나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축물은 서쪽에 위치한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전형적인 유럽풍에다 두 개의 첨탑이 인상적인 이 성당은 1558년 건립 당시부터 지진과 화재가 빈발해 소실과 복구가 반복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성당은 1748년에 착공해 1800년에 완공되었는데, 천장의 성화가 특히 아름답다. 모네다궁은 칠레 대통령의 집무실 및 거주지로 이탈리아 건축가 호아킨 토에스카에 의해 1784년에 착공돼 1805년에 완공됐다. 에스파냐어로 화폐를 뜻하는 모네다(Moneda)에서 짐작하듯이 이 궁전은 본래 조폐국으로 사용되다가 1845년부터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이 궁은 아옌데 대통령이 피노체트 쿠데타 세력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폭격으로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후 궁의 남쪽에 시민광장이 만들어졌고, 광장 지하벙커는 문화센터로 개조해 개방되고 있다. 이렇게 민주화의 역사는 건물의 성격과 주인을 바꾸고 있었다.

이 외에 광장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산타루시아 언덕, 서쪽에는 프레 콜롬비아노 박물관, 북쪽에는 중앙시장이 있다. 특히 광장 동쪽 산타루시아 언덕에 있는 칠레 국립도서관은 남미 최고의 도서관으로 손꼽히며 2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지금의 건물은 칠레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1925년에 완성했다. 석조 기둥이 전면에 늘어선 외관에서 신고전주의 양식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건물은 100여 년 전 것이지만 칠레 국립도서관의 역사는 181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에 장서도 없고 운영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 도서관이 시민들의 힘으로 지금과 같은 남미 최고의 도서관이 된 것이다. 칠레가 중남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을 배출하고, 네루다라는 위대한 시인을 낳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르마스 광장 북쪽의 산티아고 중앙시장은 각종 농산물은 물론 긴 해안선을 가진 수산물 강국답게 생선을 판매하는 곳이 특히 많았다. 이곳에서 네루다가 즐겨 먹었다는 칼디요 데 콩그리오로 점심을 먹었다. 콩그리오가 붕장어이니, 감자와 토마토를 넣은 붕장어탕인 셈이다.

아르마스 광장 서쪽에는 또 프레 콜롬비아노 박물관이 있다. 스페인 점령 이전의 남미 문화와 예술을 볼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아스텍·마야·잉카 등 고대 남미의 다양한 문명의 유물과 역사를 볼 수 있으며, 문명권과 지역에 따라 독특한 조각·장신구·악기·자기·직물·식기 등은 색다른 시각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아르마스 광장 동북쪽으로 마포초강을 건너면 산크리스토발 언덕으로 가는 도중에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산티아고의 명소 파티오 벨라비스타 지역이 있다. 이곳은 다양한 상점들이 한데 모여 있는 야외 종합문화공간이다. 개성 넘치는 작은 수공예품 상점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으며, 맥주나 커피를 즐기기 좋은 모던한 바들이 자리한다. 젊은이들 틈에 섞여 커피 한 잔을 하고는 네루다의 집을 찾아 나섰다.

칠레의 대표적 저항시인이자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 중의 한 명으로 불리는 네루다의 집은 산크리스토발 언덕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다. 이 집은 발파라이소·이슬라 네그라와 함께 네루다의 집 세 곳 가운데 하나로 ‘라 차스코나(La Chascona)’라고 불린다. 케추아어로 ‘머리를 산발한 여자’라는 뜻으로 애인 마틸데 우루티아를 가리킨다. 네루다가 아내 몰래 마틸데와 함께 살림을 차렸던 곳이다.

산티아고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기억과 인권 박물관’이었다. 1973년 9월11일 화창한 봄날에 칠레 국영라디오에서는 “지금 산티아고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는 엉터리 일기예보를 반복했다. 이 멘트는 쿠데타 작전개시를 알리는 암호였다. 칠레 정부의 국유화 조치로 구리광산을 빼앗긴 피노체트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전투기로 대통령궁을 폭격했다. 선거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열었던 아옌데 정권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 후 17년간 이어진 피노체트의 군사독재 기간 칠레에서는 최소 3천명이 피랍·살해됐고, 2만8천명의 고문 피해자가 생겨났다.

그러나 칠레 국민은 침묵하고 굴복하지만은 않았다. 아옌데에게 대통령 후보를 양보했던 노벨문학상의 작가 네루다는 병상에서도 격렬하게 항의하는 시를 쓰다가 쿠데타 발발 열이틀 뒤에 세상을 떠났다. 노래로 자유를 소리 높여 외쳤던 빅토르 하라는 5천여 군중이 지켜보는 운동장에서 개머리판으로 손목이 으스러지고 총살당했다. 남편과 두 아들, 며느리를 잃고서 독재정권의 진상을 세계에 알린 ‘실종-구금자 가족연대(AFDD)’의 지도자 아나 곤잘레스도 있었다. 죽을 수조차 없었던 그녀는 300여 건의 국가범죄로 기소됐지만 단 한번의 재판도 받지 않고 2006년 91세로 사망한 피노체트의 죽음까지 지켜보고, 지난 10월에야 93세의 나이로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 ‘기억과 인권 박물관’은 이러한 칠레의 어두운 역사를 ‘기억’하고 ‘인권’을 역설하고 있는 곳이다. 3개 층에 걸쳐 법적 서류, 신문 스크랩, 사진, 편지, 단편 영화, 라디오 방송과 시청각 자료로 구성한 다양한 매체가 전시돼 있다. 피노체트의 모네다궁 폭격 소식을 전하는 뉴스, 아옌데 대통령의 마지막 연설, 강제수용소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폭행 당하는 시민과 독재에 항거하는 시민 등 전시물 하나하나가 모두 분노와 탄식을 끌어내었다. 특히 ‘양심의 형태’라는 알프레도 야르의 작품은 이런 감정들을 한꺼번에 모아놓은 것 같았다. 벽면 전체에 500여 명의 사진이 흐릿하게 전시돼 있는데, 이들은 독재정권 17년 동안 칠레에서 실종된 시민을 상징한다고 한다.

피노체트는 박정희 정권보다 10년 늦게 시작해 17년간 독재정권을 유지했다. 군인이었던 그는 쿠데타로 민주정권을 뒤엎었고, 친미정권의 강력한 반공주의와 경제 발전을 내세우며 공권력으로 독재를 유지해왔다. 이러한 독재의 이력은 우리나라에 대입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칠레의 군부정권은 1990년에 막을 내렸지만 우리는 다시 군사정권이 이어지며 1993년에야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그 영향도 양국 모두 현재진행형이다.

파블로 네루다의 나라, 빅토르 하라의 나라, 그리고 아나 곤잘레스의 나라. 칠레는 그렇게 기억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누구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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