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국내 첫 ‘카바레티스트’가 된 테너 김주권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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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14   |  발행일 2018-12-14 제35면   |  수정 2018-12-14
“정치 사회 풍자한 연극·토크쇼·코미디 성악·대중가요 곁들여 세상 향해 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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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곁들여 사회풍자를 하는 유럽의 신예술장르인 카바레트를 익혀 국내 첫 카바레티스트가 된 테너 김주권. 그는 유쾌하고 발랄하면서도 촌철살인의 정치사회적 풍자를 통해 이 시대 힐링공연의 신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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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권의 공연에는 음악과 대화가 1대 1 비율로 섞인다. 연극, 뮤지컬, 토크쇼, 코미디 등의 여러 기법을 성악에 버무려 관객에게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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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독일 하이덴하임 오페라 축제 공연작인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의 주역 만리코로 출연한 김주권.


◆ 성악에 딴죽을 걸다

한국 첫 카바레티스트로 불리는 테너 김주권. 한국카바레트연구회 대표인 그만큼 다국적 정서를 가진 사람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인지 그는 천직을 찾는 과정에 꽤 오래 ‘자기부정’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스스로를 ‘야인(野人)’이라 부른다. 그래서 ‘야인클럽’을 만들어 야인 유전자를 가진 지역 예술가와 연대하는 중이다.

계명대 음대를 졸업하고 1995년 폴란드 쇼팽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때만 해도 대다수 선배들은 그가 유명한 성악가가 되어 돌아올 줄 기대했다. 독일 카셀시립음악원 등을 거칠 때까지 그는 바흐와 헨델에 묶여 있었다.

그는 늘 현실과 ‘엇박자’였다. 자신만의 색깔을 찾기 위해 첫 유학지인 폴란드를 떠나 독일로 갔다. 비스바덴에 있는 ‘오페라 스튜디오’를 수료했을 때도 성이 차지 않았다. 그때도 자기 목소리의 정체성을 찾지 못했다.

2002년 비스바덴에 있는 카바레트 전문 공연장인 ‘파리 저 호프 테아트’에 전속 테너로 입단한다. 거기는 ‘신천지’였다. 이젠 고인이 된 빌 프리트 베버는 그에게 카바레트를 전수한다. 그 공연장 단골 작품인 ‘나폴리의 추억’에 무려 220회나 출연했다. 공연이 없을 때는 바텐더로 일했다.

‘성악하는 사회계몽가적 만담가’, 즉 ‘카바레티스트’가 될 팔자였다. 유럽에선 인기절정인 카바레트. 하지만 한국에선 한갓 3류 딴따라의 몸짓 정도로 폄훼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정서와 한국의 정서는 극과 극이었다. 그게 김주권이 극복해야 될 현실이었다.

계명대 음대 졸업후 폴란드로 유학
獨 카바레트 공연장서 신천지 경험
‘성악하는 사회 계몽적 만담가’매료

대구 돌아와 현대음악오케스트라 창단
연극 대사 상황 맞춰가며 음악 삽입
귀국 후 10여년 무대 좌충우돌 세월
오래 버티니 내 세상도 찾아 오는 듯

정치풍자 해도 정치판 입성 절대 안해
남산동에 전문극장 ‘카바리움’오픈

◆객석은 매번 당황만 하고

2008년 2월쯤 청운의 꿈을 품고 대구로 왔다. 2009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일단 사고를 쳐보자 싶어 ‘대구현대음악오케스트라’부터 만든다. 최고원 원작 ‘킴이와 봉자의 해석남녀’를 올렸다.

남녀 배우가 대사를 주고받는 연극을 하는 가운데 그 상황에 적합한 음악이 삽입된다. 예를 들면 남자가 여자의 복잡한 심리에 대해 투덜대는 장면에선 ‘무정한 마음’을 부르고, 여자를 만나러 가는 중에는 ‘산타루치아(뱃사공이 항해 전 부르는 곡)’를 연결해 노래한다. 일부 곡을 발췌해 한꺼번에 합친 음악 형식인데 이를 ‘파스티초(Pasticcio)’라고 한다.

“카바레트는 웃음을 유도해내지만 코미디는 웃음을 만들어낸다. 카바레트는 순수한 시사평론을 통해서 웃음을 이끌어낸다. 카바레트는 시사 전달이 주목적이고 웃음은 둘째다."

무대에 올리는 소도구도 의외로 많다. 그림, 사진, 조각품, 빔 프로젝트, 동영상물, 액자, 악기 등. 김주권은 굳어있는 객석 분위기를 흔들기 위해 일부러 소크라테스 동상 같은 것도 망치로 파손한다. 요즘은 무대복으로 붉은 계열의 슈트를 잘 입는다.

관객은 당황했다. 어떤 후배는 그의 귀국독창회인줄 알고 왔다가 적이 실망하고 돌아갔다. 또 어떤 춤꾼은 ‘언제부터 댄스타임이냐’고 묻기도 했다.

◆ 툭하면 짐을 싸는 카바레트

공연을 세밀하게 분석해 봤다. 일단 대본 위주로 가니 연극 같기만 하고 즉흥성도 떨어졌다. 너무 연극스러우면 안 될 것 같았다. ‘즉흥연기’에 더 치중한다. 여기는 유럽이 아니라 한국이란 점도 중시했다. 하나씩 수정해나갔다.

그의 첫 카바레트 공연은 불발이었다. 잠시 공백이 찾아왔다. 상경해 가수 송시현과 일을 했다. 국내 첫 뮤지컬 전문 오케스트라를 만들 셈이었는데 둘의 의견차가 너무 커 다시 대구로 돌아온다. 다시 몇몇 지인들과 힘을 합쳐 시내 곽병원 근처에서 ‘햄 & 돈’이란 지역 첫 카바레트 전문극장을 오픈한다. 하지만 관계자와 견해차로 문닫고 만다. 경기도 성남시로부터 사회적 기업 스타일의 영화음악 전문 오케스트라 창단 러브콜이 들어왔다. 짐을 싸 성남으로 갔는데 거기서도 그의 캐릭터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다시 짐을 쌌다. 서울에서 콜이 들어왔다. 40대를 위한 ‘비토리아 오페라단’ 창단을 협의했지만 단장과 불화로 또 짐을 싼다. 그는 이 과정이 침몰과 몰락이 아니고 ‘마이웨이를 향한 진통’이라고 봤다.

어느 날 자기가 덜 인문학적이란 결론을 내린다. 2014년 경북대 철학과 대학원 과정에 입학한다. 거기서 쓴 석사 논문이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와 헤겔의 소외효과 비교분석’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무대를 변증법이 일어나는 장소라고 규정짓는다. 공연자와 관객이 정(正)과 반(反)이 되고 그 둘이 서로 밀고당기면서 합(合)을 향해 발전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무대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관을 노래를 통해 관철하고 싶었다. 단순히 노래로 관객을 즐겁게 하는 성악가가 아니라 관객이 생각하는 시대의 의미를 김주권버전의 인식을 통해 더욱 높은 곳으로 고양시켜주고 싶었다. 일부 그의 몸짓을 정치계 입문을 위한 쇼로 보는 이도 있었다. 그는 단호하게 ‘노’라고 말한다.

“정치를 풍자해도 직접 정치판에는 절대 뛰어들지 말자는 게 내 원칙이다.”

가락 스튜디오 이동우 대표, 드러머 석경관과 의기투합을 하고 결식아동을 돕기 위해 아트센터 ‘고리’에서 공연도 했다. 공연장을 옮겨다니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자기 공연장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걸 절감한다. 그렇게 해서 마련한 게 한국카바레트연구회 부설 공연장인 남산동 ‘카바리움’이다. 한국카바레트연구회는 지난해 대구시 지정 전문예술단체로 지정된다. 현재 카바리움은 뜻을 같이하는 사물놀이패 ‘어라디여’의 이우영 대표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국악적 기운이 들어간 ‘한국형 카바레트’를 창출하고 싶어서다.

그는 자기 공연을 ‘야매 콘서트’라고 자책한다. 올해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구라쳤다’ ‘독일문화 씹어먹기’ 등 4번의 정기공연을 했다. 준비 중인 공연은 ‘호모술피엔스’.

귀국 후 10여년 엄청 좌충우돌했다. 이제 공연장에서 가수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같은 트로트에 가까운 대중가요를 부르고 세상을 호통쳐도 ‘김주권이니까~’란 반응이 올라온다. 오래 버티면 자기 세상이 오는 모양이다. 010-3937-0118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카바레트' 란

유럽 지식인 풍자예술 장르
사회 문제·주제 무대 올려
유쾌 발랄한 유머로 풀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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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10년간의 우여곡절 풍찬노숙의 시절을 끝내고 대구 첫 카바레트 전문극장인 ‘카바리움’을 남산동에 오픈했다.

유럽에서 출발한 ‘카바레트(Kabarett)’. 유럽 지식인만의 풍자예술 장르로 인정받았다. 1881년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에서 문 연‘검은 고양이(샤 누아르·Chat noir)’가 첫 카바레트 전문 극장. 당시는 ‘선술집’으로 분류됐다. 선술집의 프랑스 말이 바로 ‘카바레(Cabaret)’. 검은 고양이는 ‘현대 카바레 문화의 시조’로 불리는 로돌프 살리가 세운 것이다. 그는 당시 최하층민이 살던 몽마르트에서 예술에 갈증을 느낀 사람들에게 술을 팔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그 카바레를 더 고상하게 치장하기 위해 ‘학회’란 칭호도 붙였다. 물론 아무나 출입할 수 없었다. 지성이 있는 자만 출입을 했다. 드뷔시는 지휘봉 대신 숟가락을 흔들며 합창단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카바레에는 자유분방하면서도 고도의 예술적 감흥이 감돌았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정치풍자(Politische Satire)’를 갈구했다. ‘짐노페티’를 작곡한 에릭 샤티도 피아니스트 겸 카바레티스였다. 에밀졸라, 보들레르, 랭보 등 유명 문인도 거기서 작품을 발표했다. 이 비판정신은 중세를 암흑기로 비판한 프랑스 계몽주의의 리더격인 볼테르의 철학을 계승한 것이다. 이 문화가 독일로 가서 카바레트로 자릴 잡는다. 유럽의 카바레티스트는 워낙 반골들이라서 히틀러 시절 처형 1순위였다.


한국에서 ‘카바레’하면 춤·무도장·제비족·바람난 아줌마 아저씨 정도를 떠올린다. 그러나 유럽에선 우리와 달리 ‘예술’로 본다. 카바레트는 하나의 장르이고 그 공연자는 ‘카바레티스트’로 불린다.

카바레트는 치니시즘(Cynicism)과 사르카즘(Sarcasm)·사티르(Satire)의 합성어. 치니시즘이란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쿠비코이의 철학사조를 의미하는 라틴어. 그는 건강에 대한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명예에 대한 욕망의 단순화에 초점을 맞췄다. 또 인간의 평등과 잘못된 정치권력의 맹점을 비꼬았다. 그의 이러한 사상들은 후대에 이르러 스토아 철학의 원천이 된다. 사르카즘은 1579년에 에드문드 스펜스의 책 ‘셰페아르드의 달력’에서 기원한다. 이 말은 그리스어 ‘사르카조(Sarkazo)’에서 나온 말로 ‘비꼼, 빈정거림’이라는 뜻. 사티르라는 말은 라틴어 ‘사투라 란크스(Satura lanx)’에서 나온 말로 ‘메들리, 여러 과일이 담긴 접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카바레트는 우리가 접하는 모든 문제나 주제들을 무대로 올려 과감히 현실을 ‘유머’로 풀어가는 방식을 취한다.

세계 3대 카바레트 국가는 프랑스·독일·미국. 독일은 코미디적 요소가 강한 ‘정치풍자’, 프랑스는 쇼 성격이 강한 ‘사회풍자’에 역점을 둔다. 독일 카바레티스트인 브레히트도 훗날 극작가로 성공한다.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코미디언 하모니스트’란 그룹에 흡수되고 그걸 토대로 스탠딩 코미디가 파생된다. 코미디언 제이 레노가 진행해온 NBC TV의 간판 토크쇼 ‘제이 레노쇼’, 그리고 ‘프랑크 시나트라쇼’ 등도 유럽발 카바레트 영향을 받아 태어난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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