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칼럼] 적폐청산과 하명수사의 종언을 고하라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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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14   |  발행일 2018-12-14 제23면   |  수정 2018-12-14
[조정래 칼럼] 적폐청산과 하명수사의 종언을 고하라
논설실장

“구타를 당할 때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은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모욕이다. … 감정이 굳어진 죄수라도 학대나 고통에 대한 분개가 아니라 학대에 따르는 모욕에 대해 분개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 내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멋대로 이러쿵저러쿵하는 말을 들어야 했기 때문에 피가 머리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Man’s Search For Meaning)’란 저서를 통해 아우슈비츠에서 몸으로 겪은 악몽 중 한가닥을 이렇게 풀어냈다. 강제 노역을 하던 중 자신의 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작업 감독에게 맞아 죽을 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감히 대들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모욕 당하지 않을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이라고 술회했다.

세월호 유가족 사찰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던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이 지난 7일 투신했다. 유서에 이유는 없었지만 이런 저런 정황으로 유추되는 사인은 모욕과 망신주기로 모아진다. 수갑 찬 전 기무사령관. 영장 실질심사에 출석하는 길, 검찰은 규정에 따랐다고 하지만 도주 우려는 전혀 없고 난동을 피울 가능성도 조금도 없는 피의자, 그것도 군 핵심기관의 수장이었던 요인을 저렇게 수갑을 채우고 포토라인에 서게 했으니 잡범이나 흉악범 취급을 했다고밖에 달리 볼 길이 없다. 인격 모독이자 조직(법인격) 살해다. 프랭클의 논리에 의하면 ‘모독 살인’이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미래의 포기’임에 틀림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전군 지휘관 회의에서 “기무사의 세월호 유족 사찰과 계엄령 검토는 그 자체만으로도 있을 수 없는 구시대적이고 불법적 일탈 행위"라고 규정하고, 지난 7월 해외 순방지에서 이에 대한 수사를 위해 특별수사단 구성을 지시했다.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에 대한 수사는 바로 적폐청산이란 미명 아래 대통령의 하명(下命)수사로 시작됐다. 적폐로 규정되는 순간 결론은 비리·불법으로 정해지고 사실상 수사 가이드라인이 제시된다.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은 이와 관련 “적폐청산의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법치 파괴를 용납할 수 없다"며 “검찰이 하명수사를 계속하는 한 무리한 수사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언제까지 적폐청산일 건가. 문재인 정권이 출범한 지 1년6개월이 지나고 내년이면 집권 3년차를 맞이한다. 말로는 협치를 들먹이면서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고 네 편과 내 편으로 진영을 가르는 적폐청산이라면 지금까지 해온 것만으로도 원성이 자자하고 피로감도 임계치다. 법과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 적폐청산은 ‘정적 제거’나 ‘정치 보복’의 다른 이름이다. 이 정권을 탄생시킨 촛불집회가 촛불혁명으로 평가되고 계승되기 위해서는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 정신에 충실해야 한다. 이를 테면 검찰의 중립성 확보와 공영방송의 독립성 보장은 영순위 제도개선 과제인데 왜 자꾸 미뤄지는지, 이제 청와대와 민주당이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폐청산은 하명수사를 하수인 삼는다. 검찰을 정권의 시녀로 둔갑시키는 하명수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지난 정권 부정과 지우기의 첨병으로 무소불위의 칼춤을 연출하며 엄청난 폐해를 초래했다. 그 후유증과 부작용은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도 여전하거나 오히려 우심해졌다. 적폐청산에 따른 하명수사는 ‘죽음’이거나 아니면 ‘살아도 산 게 아니다’로 끝을 맺는다. ‘검찰은 불러 조지고 법원은 미뤄 진을 뺀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검찰의 무리한 수사 관행은 표적 수사, 무차별 압수수색, 창피주기 수사, 과잉 수사, 별건 수사, 먼지 털기 수사 등으로 백양의 언어와 백태의 형용으로 표현된다.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은 적폐청산 수사 과정에서 스스로 생을 버린 세 번째 인물이다. 변창훈 검사와 정모 변호사는 지난해 검찰의 국정원 수사 도중 목숨을 끊었다. 수사와 재판 결과 무혐의를 받은 이들도 회복 불능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살아도 산 게 아닌 ‘죽음의 굿판’을 보지 않으려면 청와대의 하명(下命)부터 청산해야 한다.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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