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편파적인 너무나 편파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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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13   |  발행일 2018-12-13 제30면   |  수정 2018-12-13
여럿 찍힌 폴라로이드 사진
누가 가지고 가야 공평할까
룰은 그 사회구성원의 합의
지도자의 사랑 편파적일 땐
그 사회는 암울해질 수밖에
[여성칼럼] 편파적인 너무나 편파적인
김계희 변호사

오지로 의료봉사활동을 갈 때면 꼭 폴라로이드를 챙겨간다는 의사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가 체득한 바로는 이방인인 그가 부릴 수 있는 마법의 도구이자 그들과의 경계를 가장 빨리 허물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폴라로이드라는 것이다. 폴라로이드 사진 몇 장이면 온 마을 아이들을 금세 자신의 주위로 불러 모을 수 있는데, 문제는 폴라로이드 특성상 10명을 찍어도 사진은 1장에 불과한 데다 그마저도 비싼 필름 값 때문에 찍힌 사람보다 터무니없이 적은 수의 사진을 내밀 수밖에 없다 보니 필연적으로 ‘분배’라는 난제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경험에 의하면, 사회마다 그 분배의 ‘룰’이라는 것이 아이에게서조차 너무나 분명하고 다르다는 것이다. ‘이 사진을 누구에게?’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일치하여 한 아이를 지목하는데, 상대적으로 근대화가 늦은 곳일수록 나름의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있어 그 위계질서의 꼭짓점에 있는 아이, 즉 제일 힘세고 강한 아이가 갖는다는 데 모두가 동의한다는 것이다. 반면, 현재의 경제 사정은 열악하나 동유럽 인근의 어느 마을에 갔더니 모든 아이들이 가리키는 한 아이는 그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진 것 없고 약한 아이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적어도 40대가 된 우리 사회의 아이들은? 그에 따르면 ‘가위바위보’에 돌입했다고 한다. 10명이든 20명이든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한 사람이 가져가는 게 맞고, 그게 제일 공평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고 선·후진을 논할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전통과 문화가 다를 뿐이다. 약자에의 배려라는 대원칙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나 그것의 실제적 구현형태는 개별 사회마다 다를 수 있다. 공개적으로 가장 약한 자로 지목된다는 것이 배려가 아니라 치욕이어서 그 ‘룰’을 거부하고 스스로 ‘가위바위보’를 외칠 수도 있는 것이다.

‘공정사회’에 대한 열망이 수년째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다. 폴라로이드 사진 분배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공정한 ‘룰’이란 결국 그 사회구성원 사이의 ‘합의’ 문제이고, 그 ‘합의’가 공식적으로 정제된 형태가 ‘법’이다. 그런 법을 제일로 삼은 이상 어떤 법조인도 공정성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피고인의 편에서 그를 변호하고, 원·피고의 편에서 그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변호사는 공정하다기보다는 본질적으로 편파적인 지위에 있다. 하지만 책임보험에 가입하지 않고 차를 운전하다 사고까지 내고선 도리어 책임보험제도가 잘못되었다는 피고인에게, 카드를 사용하고 대금을 지급하지 못한 것은 맞지만 파산·면책 결정을 받았으니 자신은 떳떳하고 이런 자신을 사기죄로 고소하는 이가 잘못이라는 이에게, 아무리 자신도 전해 들은 이야기라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 치명적인 해가 될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고선 우선 그 사람에게 사과하고 원만히 해결하라고 종용하면 되레 자신은 조금도 미안한 게 없고 자신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람이 나쁜 놈이고 그런 놈에게 사과하라니 도대체 누구의 변호인이냐고 호통치는 이에게 아직 직업의식이 부족한 나는 제 본분을 잊고 울컥해 그들을 몰아붙이곤 한다. 변호사는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피고인에게, 당사자에게 편파적인, 편파적이어야 하는 사람이다.

한때 편파 야구 중계가 유행했다. 대놓고 편파적으로 하니 상대편은 그냥 웃고 편파적 지지를 받는 쪽이 오히려 무안해했다. 야구 중계도 아닌데, 대놓고 편파적으로 하는 방송이 요즘 너무 많다. 상대편은 웃을 수 없고, 편파적 지지를 받는 쪽은 기세등등하기만 하다. 따지고 보면 누군가에 대한 사랑만큼 편파적인 것도 없다.

한 아이가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해.” 그 ‘너’가 묻는다. “왜?”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그 ‘너’뿐만 아니라 당신도 웃을 것이다. 한 아이의 논리는 참으로 공정해 보이지만 사랑이란 그런 공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랑의 본질이 그러하므로 개개인은 편파적으로 사랑을 할 것이고 해도 좋겠으나, 한 사회의 지도자가 편파적인 사랑을 외칠 때 그 사회는 암울해진다.김계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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