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칼럼] 엘비스의 ‘게토’와 프레디의 ‘보헤미안’

  •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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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12   |  발행일 2018-12-12 제31면   |  수정 2018-12-12
[박재일 칼럼] 엘비스의 ‘게토’와 프레디의 ‘보헤미안’
논설위원

대학 80학번인 우리 세대들은 팝송을 거의 듣기만 했다. 라이브 세대가 아닌 것이다. 집이든 다방이든 습관적으로 들었다. 영어 듣기에 취약한 세대라 가사 내용은 대략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유튜브를 통해 흘러간 팝송을 심심풀이로 듣는다. 아니 본다. 아, 이런 공연이었구나. 인터넷을 뒤져 가사도 확인해보는 취미도 생겼다.

개인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가 새롭다. 그의 1970년대 초반 라스베이거스 공연은 고급티가 난다. 미국은 이때가 지금보다 더 잘 살았다는 말이 있다. 틀리지 않은 듯 ‘풍요로운 사회’를 거쳤던 흔적이 확연하다. 풍요의 미국에 로큰롤 황제는 ‘버닝 러브’ ‘러브 미 텐더’ ‘서스피셔스 마인드’로 엉덩이를 흔들었다. 여성팬은 무장해제된다. 근데 하루는 엘비스의 전혀 딴 노래에 접하고 멍해졌다. ‘게토(In the ghetto)’다.

“눈 내리던 그날, 시카고 게토에 아기가 태어난다. 엄마는 운다. 풀칠 할 입이 하나 더 는 탓이다. 아이는 커 간다. 거리를 배회하며 훔치고 싸우는 법을 배우며. 세상은 모른 척 고개를 돌린다. 절망한 청년은 차를 훔쳐 뛰쳐나간다. 손에는 ‘총’이 쥐어져 있다. 그는 차디찬 바닥에 쓰러져 죽어간다. 그래도 세상은 돌아간다. 게토에 아이가 또 태어난다. 엄마는 또 운다.”

영국의 전설적 밴드 퀸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대박이다. 영국 다음으로 흥행가도다. 700만명을 넘었다. 몇년 전 동네 음악 카페에서 이 밴드가 퀸이고, 저 친구가 동성애자 프레디 머큐리라는 지인의 설명에 감흥했던 기억이 있다. 그 비디오의 프레디는 무척 젊었다. 스타는 역시 젊은 시절이 좋다.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고 보헤미안 랩소디를 정밀 탐색한다. 아! 여기서도 피아노에 실린 첫 단어는 ‘엄마’다. “총으로 사람을 죽였어 엄마. 머리에 당겼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 난 죽고 싶지는 않아….” 보헤미안은 ‘그래도 바람은 분다’ 는 프레디의 담담한 목소리로 끝난다. 게토의 ‘엄마는 운다’처럼. 우린 가사도 모르고 그냥 퀸을 들었다.

‘이게 그런 내용이었어’ 하고 놀란 적도 있다. 수채화 같은 리듬인데, 가사에는 반전(反轉)이 있다. 케나다의 테리 잭이 먼저 불렀고, 나중에 영국 남성그룹 웨스트 라이프가 리바이벌한 ‘시즌스 인 더 선(Seasons in the sun)’이다.

“친구, 죽기가 힘들어. 새들은 지저귀고 봄은 만개했는데… 아빠 날 위해 기도해줘, 정말 죽기 힘들어. 난 왕따였죠. 어디든 애들은 있죠, 그게 저라고 생각해주세요. 태양 빛 계절 그리고 별, 그건 닿을 수 없어요.”

죽음을 앞둔 노래다. 알고 보면 처연하다. 그러고 보니 시인이기도 한 레오나드 코헨의 ‘파티젠(Partisan)’에도 죽음과 총과 바람이 있다. 2차대전 레지스탕스의 처절함이 담겼다.

가사가 와닿으면 노래는 더 완성된다. 사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이나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도 우리에겐 무척 좋은 노래이지만, 미국인이나 영국인에게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논산으로 가는 기차나 빡빡머리, 부모님께 큰 절도 경험하긴 힘들고, 또 도통 무슨 소린지 해독이 안될 테니까. 하긴 방탄소년단의 아미(A.R.M.Y)도 그래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미친다. 우리 정치다. 멜로디는 있는데 뭔가 가사와 서사가 없어 허전한, 그래서 소통이 부재하는 상황이랄까. 대통령이 별세상 사람처럼 혼자 밥을 먹고, 골목에서는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경제는 질문 받지 않겠다거나(문재인), 밖은 대형 조난사고로 초읽기인데 방에 틀어박혀 있거나, ‘장관과의 독대 그게 필요한가요’라고 반문한다면(박근혜) 리듬만 있고 가사가 부재해 소통에는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유추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도 음악을 넘은 그들의 스토리, 가사가 담겼기에 새삼 열광하지 않았을까. 멜로디는 어쩌면 이념과 신념이고, 가사는 거기에 내포된 정책이나 발디딘 현실이라면 과도한 은유일까. 정치도 노래처럼 멜로디와 가사를 버무려 소화한다면 이상적 소통이 될 것 같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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