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8] 대구의 자부심 국채보상운동<5> 한국 근대여성운동의 시초가 되다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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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11   |  발행일 2018-12-11 제13면   |  수정 2021-06-22 18:06
“천한 신분이지만 이 나라의 국민” 기생들도 나라빚 갚는데 뜻 모아
[대구의 자부심! 유네스코가 인정한 국채보상운동 .5] 한국 근대여성운동의 시초가 되다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국채보상운동 여성기념비. 대구 중구 동인동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자리한 기념비에는 부인회에서 공포한 격문 ‘경고(敬告) 아(我) 부인동포라’가 새겨져 있다.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는 나라의 위기 앞에서는 남녀구분이 없다며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작은 사진은 중구 진골목에 있는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가 중심이 되어 여성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곳이라는 표지석.
[대구의 자부심! 유네스코가 인정한 국채보상운동 .5] 한국 근대여성운동의 시초가 되다
폐교 직전에 몰렸던 교남학교를 살리기 위해 거금을 기부한 기생 앵무의 이야기를 다룬 조선민보 1937년 4월27일자 기사. 기생 앵무는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당시에도 집 한 채 값인 거금 100원을 의연금으로 내 화제가 됐다.


전국적인 범국민운동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의 불길은 여성들의 가슴에서도 활활 타올랐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에게 속한, 이른바 종속적인 존재에 불과했지만 그들도 대한제국의 같은 국민이었다. 일제에 나라가 넘어갈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에서 성별의 구분은 무의미할 뿐이었다. 

여성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특히 여성들이 가장 먼저 참여한 곳도 대구였다. 당시 대구의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를 시작으로 전국의 여성들은 다양한 단체를 조직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구 기생 앵무의 의연은 전국적인 화제가 되며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양반 부녀자는 물론 상인, 신여성, 기생, 삯바느질하던 여성까지 신분의 경계를 넘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국채보상운동을 여성이 주체가 된 최초의 근대적 여성운동의 시초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국채보상운동의 여성 참여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권 신장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대구의 자부심! 유네스코가 인정한 국채보상운동’ 시리즈 5편은 신분과 사회통념을 깨고 나라빚을 갚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대구기생 앵무 의연금 100원이 기폭제
적게는 50전 많게는 10원까지 십시일반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는 격문을 공포
국채보상운동 시작되자‘女 참여’촉구
전국 45개 단체가 나라 위해 솔선수범


 

 

#1. 사회 가장 밑바닥으로부터의 바람

대구의 국채보상의연금 수취소에 수수한 차림의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저는 앵무라는 기생입니다.”

기생이라는 말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는 천박한 신분일뿐더러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습니다. 그렇다 해도 저 또한 이 나라의 국민입니다. 하여 1천300만원의 만분의 일이라도 돕고자 합니다. 듣자하니 지금까지 나온 의연금 가운데 최고 금액이 100원이라 하더이다. 아녀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더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단은 저도 100원을 내겠습니다. 하나 남자들 중에 누구라도 천원, 만원을 낸다면 저도 죽기를 각오하고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서상돈, 김윤란, 정재학 등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끄러움과 감동 때문이었다. 이에 더 많은 의연금을 내기로 서로 간에 결의하였다.

이 소식은 곧 ‘대한매일신보’에 대서특필되었고, 동료 기생들이 그 뒤를 잇기 시작했다. 먼저 대구의 권번기생 14명이 적게는 50전에서 많게는 10원까지 집단적으로 의연금을 냈다. 그리고 3월 초에는 평양 기생 31명이 “우리들이 비록 천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국민 된 의무는 같을지니 어찌 이것을 간과할 수 있겠습니까”면서 의연금 32원을 모금한 데 이어 다른 기생 18명도 50전씩 모금하여 기성회에 납부하였다. 실제로 평양은 기생들에 의해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

부산의 기생들도 국채를 보상할 때까지 매월 의연금을 내기로 결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기생 39명이 비녀를 빼어 의연금으로 내었다. 특히 진주에서는 1907년 3월19일에 기생 부용이 동료들과 함께 ‘진주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를 구성하여 모금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도 하였다.

사실 기생은 팔천(八賤), 즉 노비, 광대, 백정, 공장, 무당, 승려, 상여꾼, 기생을 이르던 여덟 부류의 천민 집단 중 하나였다. 한때는 일종의 예술인으로 대접받기도 하였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는 오로지 성적인 소비 대상으로만 각인된 상태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생들은 이러한 상황에 굴하지 않고 사회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을사늑약 이후에는 사회적인 책무를 인식하고 실천하는 존재로 거듭나기에 이르렀다. 사립학교, 야학, 고아원 등에 후원금을 전달하고 재해 발생 지역에는 구호품을 전달하는 등 자선사업과 구호사업에서 열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앞선 앵무의 경우에도 사회가 달라지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순수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고향인 성주 용암면이 홍수로 물난리를 자주 겪자 거금을 들여 제방을 만들어준 것이 그것이다. 이에 고향에서 공덕비를 세워주었는데, 그 비석을 일러 ‘앵무빗돌’이라 이름하였다. 나아가 1927년에 달성권번을 설립해 기생들을 조직화한 앵무는 1938년에는 팔순을 앞둔 고령의 몸으로 교남학교에 2만여원에 달하는 거액의 운영비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앵무는 비주류인 여성에 신분까지 하찮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선각자였던 것이다.

#2. 규방의 작은 촛불이 전국을 밝히는 불길로

“우리는 규중에 거하는 일개 여자의 몸으로 삼종지도(三從之道) 외에는 간섭할 일이 없사오나,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 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다 하리오. 듣자오니 국채를 갚으려고 2천만 동포들이 석 달간 연초를 아니 먹고 거금을 모은다 하니 이 아름다운 일에 사람으로서 어찌 감동치 않으리오. 하나 부인들은 논의조차 되지 않는 바, 대저 여자는 나라의 백성이 아니며 천지만물이 빚은 소생이 아니리오. 다만 여자인지라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 패물 말고는 없음이라. 태산이 흙덩이를 사양치 아니하고 하해가 가는 물을 가리지 아니하듯 적음으로 큰 것을 도우려 하나니 뜻이 있으신 부인 동포들은 많고 적음을 불구하고 정성껏 의연하여 국채를 깨끗이 없애는 데 힘을 보탭시다.”

1907년 2월23일, ‘남일패물폐지부인회(南一佩物廢止婦人會)’는 격문 ‘경고(敬告) 아(我) 부인동포라’를 공포했다. 남일동에 살고 있던 정운갑의 어머니 서채봉, 서병규의 부인 정경주, 정운하의 부인 김달준. 서학균의 부인 정말경, 서석균의 부인 최실경, 서덕균의 부인 이덕수, 김수원의 부인 배씨 등 7명은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를 결성하고 여성들의 참여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격문에 담았다. 이들은 본인 소유의 은가락지, 은장도, 은가지, 은연화 등 총 13냥 8돈에 해당하는 패물을 의연하며 솔선수범했다.

남일패물폐지부인회의 의연은 지역 여성들에게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대안동에 사는 강소사 부인은 남의집살이를 하는 궁핍한 생활 중에서도 품삯 4원을 의연하였다는 기사가 2월26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렸고, 양성환의 딸로 아산 백암 이씨 집안에 출가한 뒤 청상과부가 되어 두 아들을 가르친 부인의 편지가 ‘제국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우국지사들이 국채를 보상하기 위하여 동포를 권유해 의금을 모집한다는 큰 소식을 들었습니다. 내 비록 규중의 여자이오나 또한 대한 국민의 한 사람인지라 감격의 눈물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나 살림이 심히 가난한지라 겨우 20원밖에는 보내지 못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대구국채보상사무총회소의 의연금 모금에 참여한 134명 가운데 여성이 27명이었고, 패물을 내놓은 이는 12명이었다. 아울러 대구단연상채회사무소를 통해 ‘대한매일신보’에 도착된 부인 의연자 수는 무려 277명이나 되었다.

언론에서 이를 크게 알리면서 여성들의 참여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먼저 서울에서는 1907년 2월28일에 김일당, 김석자, 박희당 등을 중심으로 반찬값을 절약해 국채보상 의연금을 내자는 취지의 ‘부인감찬회(夫人減餐會)’가 결성되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또한 1907년 3월 초에는 상류층의 부인들로 이루어진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大安洞國債報償婦人會)’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취지서를 발표한 후 전국의 부인들에게 보냈다.

“국채로 하여금 나라가 태평치 못한 바, 여자라고 하여 국가의 넓고도 깊은 은혜를 입고서도 애국성심이 없다면 신민의 도리가 아니라 하겠습니다. 이에 같은 마음으로 협력이로소이다. 본회에서 의금을 내시는 부인은 본회의 기록에 올리고 이름과 금액을 신문에 공포하겠사오니 전국 동포 부인은 동참하여 이 운동을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존의 여성 단체들도 국채보상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서울의 서울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진명부인회(進明夫人會), 대한부인회(大韓婦人會), 원일부인회 등이 국채보상의연금모집소를 설치하고 활동한 것이 그것이다.

지방은 지방대로 뜨거웠다. 도사(都事) 이현규의 대부인 하동정씨가 문중의 부녀자들과 더불어 ‘연안이씨일문부녀회(延安李氏一門婦女會)’를 조직한 뒤 식량을 절약하여 의연금을 내게 하였고, 1907년 4월에는 황해도 안악에서 ‘반지를 빼서 국채를 보상하자’는 취지로 ‘국채보상탈환회(國債報償奪還會)’가 조직되었다. 또한 부산 좌천리에서는 남성들보다 먼저 ‘부산항좌천리부인회감선의연회(減膳義捐會)’를 조직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나라가 있은 뒤에 백성이 있고 백성이 있은 뒤에 나라가 있으니, 외채 1천300만원을 갚지 못하면 우리 강토 삼천리를 보존키 어려움이라. 하나 남자만 국토에 사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생명을 지켜야 함은 매한가지이니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마음이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1907년 3월14일에는 평안남도 진남포 삼화항에서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佩物廢止夫人會)’가 결성되었다.

“1천만 여성이 1인당 2원 이상의 의연금을 내면 3천만원 정도가 될 것이니 1천만원은 나라의 빚을 갚고, 1천만원으로는 은행을 설립하고, 1천만원으로는 학교를 설립합시다.”

그리고 회원 모두가 금은, 패물 등을 일절 착용하지 않기로 규칙을 정하고 가지고 있던 패물을 팔아 국채보상의연금을 내었다.

국채보상운동을 위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활동한 여성 단체는 무려 45개에 이르렀다. 이는 남성들을 더욱 분발하게 함과 동시에 전 국민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나아가 한국 근대여성운동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 독립기념관 통권 제314호. 오국채보상운동의 발단과 전개과정, 조항래. 세계가 주목하는 국채보상운동, 나눔과 책임연구소.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집, 대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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