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국가부도의 날’ 유아인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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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07   |  발행일 2018-12-07 제43면   |  수정 2018-12-07
“국가위기 예상, 역베팅 투자로 큰 돈 벌어…답답하고 화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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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는 끝났다.” 1997년 악몽과도 같았던 IMF 외환위기까지 일주일을 남겨 놓은 상황. 남들보다 먼저 국가부도를 예상한 윤정학은 잘 다니던 증권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한 뒤 “난파선에서 먼저 나오는 사람이 생존 확률이 제일 높다”며 일부 투자자를 상대로 역베팅을 제안한다. 그의 예상대로 경제 위기가 가속화되면서 큰 돈을 거머쥐지만 한편으론 정부의 무력한 정책과 현실에 실망과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다. IMF 외환위기 속 다양한 사람들의 고군분투를 그린 ‘국가부도의 날’에서 유아인이 연기한 윤정학은 그런 인물이다. 영화의 주된 이야기에서 살짝 비껴나 있지만 유아인은 “직업배우로서 상업영화의 현실적 성취를 관객에게 안겨주고 싶었다”고 했다. “주연으로 즉각적인 사랑과 주목을 받는 것보다 즐겁게 할 수 있는 작업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 배우로서의 의지이자 목표”라고 말한 그에게도 ‘국가부도의 날’은 새로운 관점의 접근이 필요했다. 특히 “답답하고 화가 났다”고 말한 그의 반응이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은 건 영화를 보게 될 관객 역시 같은 심정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다. 그가 윤정학을 통해 사건의 중대함을 알리고 보편적인 정서 등을 담기 위해 몸을 던졌던 이유이기도 하다. IMF 환란 시대의 또 다른 단면을 담아냄으로써 행간을 흥미롭게 채워간 유아인의 남다른 진심이 읽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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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버닝’ 직후 바로 ‘국가부도의 날’에 합류했다. ‘버닝’의 종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그래서 고민이 많았다. ‘버닝’은 아주 독특한 현장이었다. 형식에서 탈피해 연기하지 않은 듯,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 게 요구됐다. 그렇게 모든 신에 등장하는 네 달 동안을 현장에서 붙박이로 살아갔다. 그러다가 상업영화 현장에 들어오니 적응이 안됐다. IMF 소재에 대한 생소함도 있어서 좋은 컨디션으로 극중 인물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과 고민이 컸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예의있는 접근이 필요해 보였다. 그때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그 부분이 영화적인 재미와 함께 이뤄져야 했다. 다행히 좋은 선배님들이 있고 내가 극을 이끌어가는 리더의 역할이 아니어서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극의 중심에서 실험적인 인물들을 연기해왔다면 윤정학은 그 중심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물론 그 안에서도 유아인만의 캐릭터와 세계를 만들어갔는데 나름 흥미로운 작업이었을 것 같다.

“정학은 다른 캐릭터들과의 어떤 조화보다는 힘 있는 에너지로 새로운 재미를 발생시켜야 하는 인물이다. 이전 작품들이 매번 나의 새로운 모습들을 꺼내 실험적으로 던져진 경우라면, 이번엔 다른 깊이와 접근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줘야 했다. 악의 축을 담당하는 것도 아니고, 세대간의 갈등 안에서 병들어가는 청춘을 표현하는 것도 아닌, 어찌보면 아주 복합적인 인물을 입체적으로 표현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흥미로웠다.”


“IMF 외환위기 생소한 소재 걱정·고민 커
극 이끄는 선배들 믿고 해볼 만하다고 생각
복합적 인물 입체적으로 표현 흥미롭기도”

“위기이용 베팅 성공한 젊은 금융맨의 성취감
성공뒤 정부의 무력한 정책·현실에 실망도
감독과 많은 대화, 멋스럽고 위트있게 담아”

“재테크 관심 無, 가치·재미 추구하는데 집중
갤러리 운영, 신진작가 꿈 조금이나마 도움
진심다해 연기 오래 사랑 받는 길이라 생각”



▶다른 인물들에 비해 다소 튀는 윤정학 캐릭터가 흥미롭긴 했다.

“그 부분에 대해 우려감을 표시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나는 솔직히 기대감이 컸다. 정학은 튀고 돌출돼야 하고, 차갑기보다는 굉장히 감각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조금 과잉된 에너지로 표출해야 했다. IMF가 오기 전까지 OECD 가입, ‘아시아의 네 마리 용’ 등 온통 호황만을 알리는 그 시기에 멋과 욕구가 폭발하던 정학은 그 자체로 돌출되는 인물이었다. 기성세대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당시 젊은이들과도 달리, 전혀 다른 삶의 방향으로 접근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시원시원하게 그 부분을 부각시키는 게 영화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감독님도 같은 생각이었다.”

▶국가 위기에 베팅해 큰 돈을 벌었지만, 정작 돈을 번 투자자에게 “돈 벌었다고 좋아하지 마”라며 화를 낸다. 그의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했나.

“모두가 감정적이고 에너제틱하게 트랙을 질주하며 그들 각자가 추구하는 하나의 욕망을 향해 달려간다. 국가 부도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이익을 좇는 행위가 지탄받을 수도, 부정적으로 비쳐질 수도 있지만 대부분 잘 살고 싶어한다. 다만 뭔가를 성취한 사람들도 주변의 곤란한 상황들과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인간적인 감정들이 충분히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예측한 미래가 맞아 떨어졌기에 충분한 성취감과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타인의 불행 앞에서 뭔가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게 인간 아닐까.”

▶그런 지점들이 잘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캐릭터 설정과정에서 감독과 의견 조율은 어떻게 이뤄졌나.

“사실 캐릭터를 100% 완벽하게 이해해서 표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의 허점은 있고 인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의 입체감이 좀 더 잘 세공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도 매번 이 정도면 크게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젊은 나이에 금융맨으로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고 현실적인 감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윤정학같은 인물은 당시 많았을 것이다. 정학은 천재적이라기보다 본인 일의 연장선에서 좀더 분명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다.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새로운 해석들을 가지고 있다면 극중 보이는 행보가 아주 개연성이 없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부분에서 감독님과 얘기를 많이 나눴다. 당연히 유아인을 캐스팅하셨을 때는 기존의 유아인이 가지고 있는 느낌부터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지점들이 감독님이 상상하고 기대하는 선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학이 재밌고 멋스럽게, 때로는 감각적이고 위트있게 담겨졌으면 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국민에게 IMF는 세대별로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이 다를 텐데, 당신이 느꼈던 IMF는 어땠나.

“당시 12세였기 때문에 그 상황이 실질적으로 피부에 와닿지는 않았다. 물론 어른들이 힘들어하는 건 느꼈다. 아버지가 건설업을 하셨는데 IMF 이전에 부도가 난 적이 있다. 집 안 곳곳에 빨간 딱지가 붙고 빚쟁이들이 집을 찾아오고 그랬던 경험이 있어서 IMF가 그리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그러다가 아버지 사업이 잘 될 때는 풍족히 잘 살고 있다는 느낌도 가져보고. 그렇게 삶은 계속 이어졌던 것 같다.”

▶윤정학처럼 재테크에 관심이 있는 편인가.

“재테크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다양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보니 다른 가치와 재미를 추구하는 쪽에 집중하는 편이다. 비싸고 좋은 것을 추구해봐야 손에 쥐어지지 않는 욕망으로 발현될 뿐이다.”

▶아트 그룹 ‘스튜디오 콘크리트’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건 어떤 의도로 만들었나.

“몇몇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십시일반 지금을 모았다. 완전한 수익사업이라기보다는 신진작가들을 발굴하는 갤러리 비즈니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유롭게 일을 하면서 재미있는 일들을 추구할 수 있고, 결국 이런 경험들이 나에게 긍정적인 순간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예술 콘텐츠가 점점 다양해질수록 그 분야에 대한 희망과 꿈을 가진 친구들이 많이 생겨나는데 반해 진입장벽은 점점 높아지고 입구는 좁아지는 상황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주고 싶어 시작했다. 아직 주류에 진입하지 못했거나, 자신의 작품을 널리 알리지 못한 사람들이 대상이다. 이 일을 진행하면서 느낀 건 보다 실질적인 정책, 그리고 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좀더 세련된 태도들, 즉 꼰대성을 벗고 유연한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마저도 있는 사람들이 독식하는 게 아니라,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정책적으로 지원이 이뤄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인터뷰 내내 철학적 사유가 느껴진다. 평소 관련서적을 많이 접하는 편인가.

“철학서를 일부러 읽지 않아도 배우는 수많은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인물을 연구하고 공부한다. 나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 십대 때 연기를 시작했다. 그럼에도 일의 특성이 있다보니 인간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내가 맡은 인물은 어떤 마음일까, 주변에 펼쳐진 삶은 어떤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하고 연구해왔다. 그래선지 또래의 친구들과는 달리 삶을 대하는 자세와 생각이 좀더 깊이 있게 축적되는 것 같았다. 나처럼 십대 때 데뷔한 혜수 선배만 보더라도 사람이 달라보인다. 연예인이니까 튄다는 게 아니라 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많은 생각과 고민, 그리고 진심을 갖고 접근하는 분들이 오랜 시간 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다면.

“내가 공감을 해야 하고 표현의 욕구가 생겨나야 한다. 물론 그 욕구들의 우선 순위는 판단기준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20대 때는 끊임없이 새로운 인물을 만나는 재미를 추구했다면 ‘버닝’을 기점으로 그저 단순한 새로움이 아닌, 다른 깊이, 다른 결, 다른 지점들에 관한 인물들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다른 해석의 지평을 열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 같다. 물론 새로운 인물을 오롯이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좋은 시나리오를 만나고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배우의 입장에서 어떤 절대적인 선택이나 기준이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처해진 상황에서 나름 최선의 방안을 찾아가고 있을 뿐이다.”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제공=UAA·김재훈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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