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 외길 ‘미싱맨’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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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07   |  발행일 2018-12-07 제33면   |  수정 2018-12-07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태창미싱 곽병문
일흔아홉까지 대신동 미싱골목 지키는 토박이
전국의 돈 다 모이는 상권, 그 중심부에 미싱골목
난 기술로 무장되어 황금어장에 뛰어 든 강태공
지금은 가게마다 쌓인 미싱…인적은 거의 없어
64년 외길 ‘미싱맨’
15세에 미싱업에 뛰어들어 64년째 대신동 미싱골목의 토박이 미싱맨으로 살아온 태창미싱의 곽병문 사장. 평생 대신동을 한번도 떠나보지 못한 그는 대구섬유산업의 흥망성쇠와 함께해온 미싱의 산증인이다.
64년 외길 ‘미싱맨’
1960년대 초 외국 미싱의 틈을 파고들며 한국형 미싱의 신지평을 열었던 국산 부라더미싱.

그 시절에는 ‘묻지마 미싱’이었다. 다들 ‘주민등록증’처럼 품고 살았다. 집 밖을 쉬 뛰쳐나가기 힘들었던 아녀자들. 그들은 미싱 곁을 떠나지 않았다. 미싱과 ‘현모양처’는 수저처럼 짝으로 붙어다녔다.

공단시대가 도래했다. 도시로 쏟아져 나온 청춘남녀들도 어김없이 미싱 앞에 앉았다. 그들은 ‘공돌이·공순이’로 폄훼됐지만 하나같이 ‘효자’였다.

하지만 이젠 그런 세월이 아니다. 그 시절은 ‘미싱 권하는 사회’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수많은 물건이 인건비가 싼 중국·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제조돼 국내로 밀려 들어온다. 미싱이 용처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똑똑한 여성은 집에 있을 겨를이 사라졌다. 미싱은 더 이상 여성의 몫이 아니었다. 추억의 미싱은 점점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하지만 그런 미싱 추락시대에 새롭게 자기만의 홈패션을 연출하는 사람들이 미싱의 제2전성기를 일궈가기도 한다. 미싱의 절망과 희망, 나는 그 중간에 서 있다.

‘대신동 미싱골목’을 아는가. 이 골목은 대구 중구 달성공원에서 5분 정도 떨어져 있다. 나는 평생 그 골목을 벗어나지 못했다. 난 닻처럼 그 바닥에 내려앉아 미싱 외길인생을 걷고 있는 태창미싱 사장 곽병문이다. 올해 일흔아홉. 미싱을 빼면 난 아무것도 아니다. 서문시장 근처 내 집에서 일어나면 걸어서 여기로 출근한다. 별일 없으면 종일 미싱하고 산다.

초겨울로 접어든 미싱골목. 그렇게 썰렁할 수가 없다. 여긴 해묵은 미싱 집합소. 새 모델도 있지만 이 골목의 진가는 이제 단종된 추억의 미싱 모델을 품고 있다는 것. 이 길을 분석하면 한국경제의 어제와 오늘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가게마다 미싱만 수북하게 모여 있다. 행인은 거의 없다. 호시절에는 가게 미싱 수보다 더 많은 행인이 북적댔다.

성주군에서 터전을 잡았던 부모. 일제강점기 중국 산둥성으로 피신했다가 광복 직후 대신동에 안착했다. 부모는 서문시장에서 체 장사를 했다. 하지만 워낙 잦은 화재로 그마저도 접어야만 했다. 가세도 내려앉아 상급 학교로 진학할 처지도 못됐다. 공부가 아니라 ‘기술’을 잡아야만 했다.

15세 때 난 어른이 됐다. 어린 나이에 사회인이 됐을 때 1950~60년대 대신동 상권은 상상을 초월했다. 전국의 돈이 여기로 다 모여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중심에 서문시장이 있었고 그 핵심부에 미싱골목이 있었다. 대신동에서 형성된 돈은 대구 여타 골목을 다 먹여살리기 시작한다. 서울은 아직 전쟁 복구 중이었다.

대구 미싱골목의 출발은 현재 자리가 아니다. 동산병원 정문 맞은편이다. 당시 상권의 80%는 피란민이 장악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 상공인이 깔아둔 미싱은 황소 몇 마리와 맞먹는 재산목록 1호급이었다. 그것만 갖고 있으면 굶어죽지 않을 수 있었다. 다들 피란 갈 때 그걸 달구지 등에 싣고 올 수밖에 없었고, 그렇지 못하면 자기만 아는 데 파묻어 놓았다가 전쟁 직후 그걸 다시 파내 녹을 닦아낸 뒤 가게를 다시 열기도 했다. 그때는 너무 영세했다. 가게 크기는 평균 16.5㎡(5평). 거기에 10대 남짓한 미싱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나름 파워가 있었던 ‘대성미싱’에 취직한다. 지금도 그 길에 있던 미싱집들이 거의 생각난다. 제일, 신흥, 서일, 금원, 대신, 대영, 서문, 동일, 신광, 금성…. 1950~60년대를 주름잡은 미싱가게는 얼추 15군데가 있었다. 이후 미싱골목은 동산병원 앞길 확장, 임차료 인상 등으로 인해 1970년쯤 대거 서문교회와 맞물린 대신동 네거리 북서쪽으로 이전한다.

당시는 주택가와 상가의 구분이 별로 없었다. 기와집, 함석집, 판자집, 초가 등이 혼재했다. 출출하면 가게 근처에 있던 강산면옥의 냉면을 먹었다. 1960년대엔 길 건너 갈비골목의 터줏대감이었던 진갈비에서 갈비를 뜯을 수 있었다. 강산면옥은 후에 교동시장 쪽으로 이전한다.

나의 출발은 좋았다. 지금의 미싱이 돌이라면 그때는 ‘황금’이었다. 나는 황금어장에 낚싯대를 갖고 나타난 ‘강태공’이나 마찬가지였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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