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국건정치칼럼] ‘하인리히 법칙’의 트라우마

  • 송국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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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03   |  발행일 2018-12-03 제30면   |  수정 2018-12-03
대형사고 전 항상 일어나는
같은 원인의 경미한 사고들
朴정부는 경고무시로 몰락
연달아 불거진 靑 기강해이
정권에게 보내는 경고인가
[송국건정치칼럼] ‘하인리히 법칙’의 트라우마
서울취재본부장

1930년대 미국 한 보험회사에서 사고통계 업무를 하던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는 산업재해 사례 분석을 통해 하나의 통계적 법칙을 발견했다. 산업재해로 중상자가 한 명 나오면 그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인리히는 저서에서 이를 ‘1:29:300 법칙’이라고 칭했다. 큰 사고는 우연히 또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게 아니라 그전에 반드시 경미한 사고들이 반복되는 과정을 거친다는 점을 실증적 통계로 제시했다.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일정 기간 여러 번의 경고성 징후와 전조들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통계치는 노동현장 재해뿐 아니라 각종 사고나 재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위기, 개인의 실패에도 확장해석되면서 ‘하인리히 법칙’이라고 불린다.

박근혜정부가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하인리히의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권 초기부터 ‘문고리 3인방’을 포함한 청와대 일부 참모들과 정치권 친박들이 호가호위하며 국정 곳곳에 개입했다. 문제가 되면 부상을 당할지 모르는 잠재적 징후가 있었던 셈이다. 최순실도 이 단계에서 이미 이권이 보이는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녔다. 그러다 2014년 11월 ‘정윤회 리스트 사건’이 터졌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문건 내용은 ‘찌라시’라고 일축하고, 문건 유출에만 초점을 맞춰 ‘국기문란’이라고 했다. 그 덕에 정윤회 문건 관련자들은 ‘경상’만 입은 채 사건이 봉합됐다. 그 일을 경고성 징후와 전조로 깨달았다면 정권 자체가 중상을 넘어 운명을 다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최근 드러난 문재인정부 청와대 참모들의 일탈 행위는 박근혜정부 참모들의 국정농단과는 결이 전혀 다르다. 비서실장 핵심 측근인 의전비서관의 심야 음주운전 적발은 대통령의 영이 먹히지 않은 기강해이에 해당한다. 대통령 보좌진의 정신자세 문제이지, 권한을 오용하거나 남용해 국정 자체를 흔든 건 아니다. 검찰에서 파견된 민정수석실 산하 반부패비서관실 특별감찰반 수사관의 지인에 대한 경찰수사 파악, 셀프 승진 시도, 다른 감찰반원들과의 부적절한 골프 의혹은 청와대 기강이 밑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음을 읽게 하지만 개인적 일탈에 가깝다.

그럼에도 만사 불여튼튼이다. 궁금한 건 권력 핵심부가 하부조직의 이런 균열을 경고성 징후와 전조로 인식하고 있는지 여부다. 특감반 수사관은 문제가 불거지자 11월14일 검찰로 원대복귀됐는데, 언론보도가 나온 직후인 28일에야 청와대가 관련 공문을 검찰에 보냈다고 한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으면 그냥 조용히 넘기려고 했든,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든 둘 중 하나일텐데, 둘 다 문제다. 하인리히 법칙은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면밀히 살펴 그 원인을 파악하고 잘못된 점을 시정하면 대형사고나 실패를 방지할 수 있지만, 징후가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로 번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정권에서 잘못돼 가는 징후를 포착하고 환부를 도려내 중상을 예방하는 일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몫이다. 국가 사정기관을 사실상 통할할 뿐 아니라 정부부처와 공기관을 감찰하고 청와대 참모들의 기강도 점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근혜정부 몰락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방조한 우병우 당시 민정수석의 책임이 컸다. 지금의 조국 민정수석은 어떨까. 인사검증 부실, 정치성 짙은 SNS 활동 논란으로 야당 공격을 받아 잠재적 부상자가 됐고, 마침내 직속 부서가 경상을 입었다. 정권 핵심부에선 이를 하인리히의 경고로 받아들일까, 아니면 반대세력의 저항으로 입은 경상으로 치부할까.
서울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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