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칼럼] 사실·가치가 뒤섞인 국정운영은 국가적 불행 자초

  •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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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28   |  발행일 2018-11-28 제31면   |  수정 2018-11-28
20181128
박재일 논설위원

며칠 전 한 통신사 뉴스를 읽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독해했다고 여길 정도였다. 기사의 첫 문장은 이렇다. “울산지법의 김태규 부장판사가 사법행정권 직권남용에 연루된 판사들의 탄핵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낸 법관대표회의를 탄핵하자는 다소 ‘황당한’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해 파문이 일고 있다.”

나는 ‘황당한’이란 표현에 황당했다. 판사 탄핵은 찬반투표에서 한표 차이로 결론이 날 정도로 맞서는 사안이다. 외관상으로는 문재인정권의 검찰이 재판거래 의혹 혐의로 박근혜정권의 대법관들을 수사하고 있다.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정반대의 시각이 존재한다. 내가 만난 판사는 ‘직권남용죄의 남용’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한 쪽만이 황당한가. 사실 언론 문법으로 보면 이건 기사가 아니다. 기자는 차라리 자신의 주장을 담은 사설이나 칼럼을 쓰는 것이 맞다.

대학 시절 정치학 개론 시간에 교수님의 질문이 있었다. ‘사실’에 반하는 단어가 무엇이냐고. 사실에 해당하는 영어 ‘fact’는 요즘 방송에서 흔히 ‘팩트 체크’란 말로 유행한다. 언론은 팩트로 시작되니까. 교수님의 질문에 학생들은 거짓, 사실 아님 등으로 답했다. 정답은 가치, 즉 ‘value’다. 그러면서 덧붙이시길 사회과학을 하는 이라면 평생 이를 잘 구분해야 한다고. 쉽게 말해 주관과 객관, 존재와 당위의 문제를 구분하려고 애쓰고 최대한 구분할 때 논리가 형성된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자동차와 조선업 경기가 살아나는 조짐이 있다고 언급하며 ‘물 들어 올 때 노 저으라는 말처럼 기회를 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논란이 됐다. 특히 보수언론은 무슨 근거로 자동차·조선업에 물이 들어오는 중이냐고 비꼬았다.

문 대통령은 8월부터 자동차 생산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조선도 수주 실적이 71% 늘어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탈환했다는 ‘사실’을 적시했다. 이건 미세하지만 사실이다. 그런데 현장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자동차 산업은 수년 동안 침체다. 현대·기아차의 매출은 정체이며 이익은 감소추세다. 현대차 주가는 3년간 추락 중이다. 대구를 비롯한 지역 자동차 부품업체는 빈사상태에 가깝다. 오늘 내일 하는 형국이다. 조선업도 다르지 않다. 세계 최대 현대중공업의 올해 매출 추정액은 15조4천억원으로 3년 전인 2015년 46조3천억원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50만원을 넘었던 주가는 13만원대다. 물론 세계 조선업이 최근 바닥을 탈출하는 듯 하는 점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물이 들어올 호황 조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거제도를 비롯한 조선공장 기지는 불황의 한파가 휩쓸고 있다.

현실은 존재하는데 기자나 대통령은 왜 다른 해석을 할까. 이건 결국 사실과 가치의 혼동, 혹은 사실과 가치의 뒤섞임에 연유한다. 흔히 말하는 보고 싶은 것, 믿고 있는 것만 보는 심리와 논리라 할까. 대통령 발언이 있은 그날 오후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들에게 문자를 돌려 ‘문 대통령의 언급은 산업부에서 매월 발표하는 통계인 일 평균 자동차 생산동향이 증가한 것을 기초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 부분에서 더 실망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보좌질(質)을 제공한다는 대통령 비서들이 그렇게 미세한 통계만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대통령은 ‘물 들어온다’고 말씀하시게 만드는가.

그러고 보니 문 정부 들어서는 유독 통계를 둘러싼 시비가 많다. ‘신념의 정부’라서 그런가. 통계해석을 놓고 통계청장까지 전격 교체될 정도였다. 문 대통령도 나라 경제가 정말 좋아지길 진짜 바랄 것이다. 그렇다해도 바라는 희망과 존재의 현실은 다르다. 올해 초 거의 모든 증권사들은 대한민국 주가가 3,000포인트를 넘거나 근접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새 정부의 힘이 실리고 남북해빙 무드로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해소될 것이라며. 따지고 보면 그런 주가 예측도 올라가길 지극히 바란 소망의 가치를 담은 데 불과한 셈이 됐다. 이건 애교이고, 국가의 운명을 논하는 데서는 그런 희망과 사실을 뒤죽박죽 섞어서 결론을 내린다면 국가적 불행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나의 칼럼은 주관이 섞인 것이다.

박재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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