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머리의 작은 기적] 인성교육 - ‘하류지향’을 고민하다

  • 최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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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26 07:51  |  수정 2018-11-26 07:54  |  발행일 2018-11-26 제18면
“무엇을 위해 공부하나요?” 물음에 함께 답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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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최소영기자 thdud752@yeongnam.com

‘하류지향’을 읽었다.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 성장 거부 세대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이 부제다. 책은 학력 저하를 깨닫지 못할뿐더러 모르는 게 있어도 개의치 않는 새로운 유형의 아이들, 게다가 ‘왜 공부해야 하나요’ ‘이걸 배워서 뭐해요’라고 하면서 배움을 흥정하며 끊임없이 공부에서의 도피, 나아가 일에서도 도피하려는 새로운 사회 집단의 출현을 다루고 있었다.

일도, 공부도 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을 ‘하류’라고 인정해버리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는 우치다 다쓰루 교수의 글은 일본의 교육과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있지만 읽는 내내 우리나라 학교와 사회의 현상을 말하는 것 같아 전혀 낯설지 않았다.

스스로 ‘하류’라 칭하는 새로운 세대
물건 사듯 배움을 거래수단으로 여겨
교육의 유용성 몰라 공부 거부하기도
교사는 ‘배우고 싶은 환경’ 만들어야

요즘 아이들과 삼십 년 전 아이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처음 사회관계에 들어설 때 노동을 통해 들어가는가, 소비를 통해 들어가는가의 차이다. 삼십 년 전 아이들이 가족이라는 최초의 사회관계 속에서 처음으로 유용한 구성원으로 인지되기 시작한 것은 가사노동을 분담하면서부터다. 작지만 가족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감사와 인정을 보상으로 획득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져가고 사회화 과정을 밟아간다. 좀 더 자라면 바깥 사회활동에도 참가하는데 타인에게 뭔가 도움되는 일을 하면서 그에 대한 감사와 사회적 승인이라는 대가를 받는 교환 행위를 통해 자기 정체성의 기초를 만들어 간다.

참 맞는 말이다. 옛 속담에 모내기 철에는 아궁이 앞의 부지깽이도 뛴다고 했다. 일손이 부족하니 고사리손이라도 보태야 했다. 바쁜 엄마를 도와 걸레질을 해야 했고 때론 빨래도 해야 했다. 다섯 살 어린 막냇동생을 업고 숙제하던 어릴 적 기억이 새롭다. 농사를 짓던 집의 친구들은 더 많이 일했다. 이러한 노동을 통해 유용한 사회 구성원들이 된 경험을 했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사회에 기여하는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고 나아가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아이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다. 아이들은 돌아다니는 자체가 집안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소여서 가능하면 그들에게 할당된 공간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이들의 최대 공헌이 되었다. 또한 소비 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할 것을 거의 제도적으로 강제 당한다. 소비하는 일로 사회 활동을 시작한 아이들은 인생의 아주 초반부터 ‘돈의 전능성’을 경험한다. 소비 주체로 등장하는 한, 그 구매 주체의 다른 어떤 부분에 대해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다는 각인….

요즘 아이들의 첫 사회 활동은 천 원짜리를 들고 슈퍼에 들어가 과자를 산 경험이 아닐까? 돈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슈퍼 주인은 80세 노인이나 3세 어린이나 상관없이 내미는 돈만큼의 값어치로 보상해야 한다. 우치다 교수는 이것을 ‘돈의 전능성’이라 표현했다.

돈의 전능성, 현실적이지만 참 무서운 말이다. 학교에 다니던 딸과의 예전 대화. “시험 기간인데 공부 좀 하지?” “내가 공부하면 엄마는 나한테 뭐해 줄 건데?” “성적 오르면 휴대폰 사 줘!” 무수히도 오고 간 이런 종류의 대화가 생각난다. 아이들은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듯 수업 시간에도 배움을 사는 사람으로 위치를 선점한다. 내가 필요하지 않으면 사지 않아도 되는 위치. 그러니 모르거나 못하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러운 현상은 아닌 것이다. “모르는 게 뭐가 문제죠”라고 천연덕스럽게 되묻는 학생들. 수업 시간, 책도 공책도 꺼내지 않으면서 “읽을 줄 몰라요” “적을 줄 모르는데 어쩌라고요!” 했다는 초등학교 사례를 들은 적이 있다. 아이들이 배움의 의미와 유용성을 이해할 수 없으니 온몸을 다해 배움에서 도피하거나 다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교육의 역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 거죠” “이 지식은 어디에 쓰이나요”라는 질문의 똑똑함과 날카로움이 오히려 자신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고 하고 있다. 교육의 역설은 자신이 현재 배우는 것이 어디에 쓰일지 아직은 잘 모르고, 자신들의 저울로는 그 가치를 잴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그들이 배워야 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일정 부분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또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보면 ‘배움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니 ‘어떤 배움이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학생들이 자신의 행위의 근원에 대한 정당한 물음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배움의 의미에 대해 더욱 깊이 고민했으면 한다. 그러한 학생의 고민과 의문에 대해 배움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 교사와 부모의 역할이라 생각하며 책임감을 가진다. 아이들의 눈으로도 학교에서의 배움이 사고 싶은 것으로 만드는 사회의 구조적 환경도 필요할 것이다. 말은 쉬운데 이 또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일본과 유사한 현상이 근래 우리의 교실이나 사회에도 나타나는 것이 고민스러워 몇 자 적어보았다.

신현숙<대구 조암중 수석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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