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한 아름다움을 주는 일본 다테야마의 가을풍경. |
얼마 전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가을 단풍을 보러 가자는 말에 혹해서 따라 나섰는데 도야마공항에 도착하면서부터 일이 꼬였다. 여행 가방을 찾아 끌고 나오는데 가방에 구멍이 나 있었다. 남편이 홈쇼핑에서 사둔 작고 아담한 여행 가방이 있기에 내 옷가지며 화장품을 넣어 갔다. 가방을 비행기 화물칸에 실어 보냈다. 기내에 가지고 타야 할 것을 화물칸에 넣었던 게 실수였다. 가방이 그렇게 깨져 버릴 줄은 몰랐다. 우선 저녁에 호텔방을 배정받고는 천 가방이라도 하나 사려고 거리로 나섰다. 그런데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다. 문을 열고 영업을 하는 곳은 식당밖에 없었다. 호텔 길 건너편에 보이는 백화점도 폐점 시간이 오후 7시다.
다이소에서 장바구니를 구입해 오는데 호텔 복도가 시끌시끌하다. 나이 지긋한 여자들이 “숙자야 어디 있니”하며 방방이 두드리면서 이름을 부르고 다니고 있다. 일행이 어느 방에 있는지 몰라 찾느라 수선스럽다. 남을 배려하는 양식있는 행동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한 동네에서 같이 온 팀 17명이 내내 눈에 거슬렸다.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가이드는 단체의 힘에 밀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편리를 봐준다. 누가 여행을 간다면 단체 여행객이 있는 패키지는 극구 말리고 싶다. 단체 관광객이 있는지 물어 보지 않은 것이 불찰이었다. 사람들의 교양과 품격도 국력의 일부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누르스름한 침엽수림과 참나무 풍경
검소·근면한 일본인 모습과 닮은 듯
한국은 고운 빛깔 뽐내며 화려한 자태
개성·독창적·신명 많은 성격과 비슷
산 중턱 굴 뚫어 길 만든 구로베 협곡
징병으로 노역한 선조들 생각에 숙연
단풍 보러 왔는데 일본 다른 지방의 단풍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기 다테야마의 단풍은 좋다고 말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 곳곳의 단풍이 훨씬 아름답다. 침엽수림과 참나무가 많아서인지 그냥 누르스름하다. 일본의 알프스라는 다테야마와 구로베 협곡을 보고 일본의 단풍을 말하긴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본 단풍 소감은 은은하고 은근하다. 각 지역의 수종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설악산, 내장산, 지리산 어디를 가든지 가을 단풍이 화려하다. 단풍 빛이 고와 연신 탄성을 지르며 산을 올랐던 기억이 난다. 거기에 비하면 다테야마의 단풍은 화려하지 않다. 단풍에서도 그 나라의 국민성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는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남을 배려하며, 은근하면서 강하고, 부모의 직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검소하고 근면한 것이 단풍에도 배여 있는 것 같았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경우는 단풍 빛깔이 화려하고 곱고 화끈하다. 개성적이고 독창적이며 신명이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정을 닮은 듯하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저만 밝은 빛을 내뿜는 단풍이 어딜 가든 튀고 싶어 안달난 우리나라 사람 같다.
여행에서 그나마 일본의 삼나무숲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메타세쿼이아같이 나무 우듬지가 뾰족해 멀리서보면 트라이앵글처럼 세모 형태다. 우리나라 전나무처럼 잎이 뾰족하다. 아키라 감독의 ‘夢’이라는 영화 속의 한 배경에 삼나무숲이 펼쳐진다. 여우결혼식을 하는 장면에 아름드리 커다란 삼나무숲이 나온다. 영화 속에서 삼나무숲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는 언젠가 삼나무를 보러 일본에 가야지 했던 생각이 떠올라 삼나무를 유심히 보았다. 영화 속처럼 우람한 삼나무가 아니어서 아쉬웠다. 아키라 감독은 어디에서 그 삼나무숲을 찍었을까?
다테야마 무르도에서 전기버스를 타기 전에 산책을 했다. 길을 따라 올라가니 푸른 빛 호수가 있다. 작은 분화구 주변 땅은 분화구에서 나오는 가스로 허옇게 되어 있다. 군데군데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 오고 있어 유황 냄새가 진동한다. 해발 2천m가 넘는 곳에 케이블카, 트롤리버스, 로프웨어 같은 다양한 교통수단이 준비되어 있었다. 차례로 교통수단을 이용해 구로베댐을 갔다. 구로베댐은 엄청난 규모와 높이를 뽐내고 있었다. 굴을 지나는데 엄청난 물이 흘렀다. 물소리가 콸콸거리며 굴을 울렸고 벽을 타고 흘러 무섭기도 했다. 다음날 올라 간 구로베 협곡도 굴을 뚫어 길을 냈다. 산악 기차를 타고 협곡을 건너갔다. 산 중턱에 굴을 뚫어 길을 내다니 대단한 투지와 끈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노동에 우리나라 선조들이 징병으로 끌려와서 노역을 했다니 가슴이 저릿하다. 우리나라를 되찾았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그날 저녁 일본 다다미방이 있는 숙소에 머물렀다. 3층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내 마음은 참 이상하다. 남들은 좋다고 하는 곳에서는 시큰둥하고 아주 사소한 곳에서 감동을 받으니 말이다. 바다와 강이 합쳐지는 곳이었다. 창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빗방울이 물 위에 떨어져 파문을 일으킨다. 여행 중에 비 내리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은 또 다른 맛이다. 강과 바닷물의 합수 지점이라 엄청 넓어 보였다. 어두컴컴한 바다 같은 강을 보며 일본 작가 마루야마 겐지의‘물의 가족’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물에 대한 감각적인 표현과 시적인 문체에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대로 검은 강물과 불빛과 빗물을 바라보며 밤을 지새우고 싶었다. “밤은 물소리와 함께 깊어간다”는 소설의 한 구절을 중얼거려 보았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집을 떠나 외진 곳에 숨어 살듯이 겐지 자신도 은둔 생활을 하며 소설을 쓴다. 작가 정신을 지키며 본인의 작품으로 말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소설가다. 세상과 타협해 자기의 명성으로 구걸하지 않는 작가. 그는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새벽 4시에 일어나 한두 시간 맑은 정신으로 글을 쓴다고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소설을 쓰는 것이지 그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결연한 문학의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거기 강물이 있어서 그나마 여행다운 여행이 되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오니 아파트 마당에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다. 단풍 보러 멀리 갈 것도 없구나 싶다. 우리나라는 왜 ‘단풍관광상품’ 개발을 하지 않는지 아쉽다. 우리나라도 한두 군데 정도는 외국인들에게 소개할 ‘단풍명소 트레킹’을 개발하면 좋을 것 같다.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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