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팔공산 은해사와 4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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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23   |  발행일 2018-11-23 제37면   |  수정 2018-11-23
“바위 속에서 부처님도 김유신도 내면의 어둠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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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암암에 있는 김유신 장군이 수도한 굴, 일명 극락굴이라 한다. 기도하여 아들 셋을 얻었다는 전설의 삼인암의 비경. 중암암 자연석문·돌구멍절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한다. (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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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사 경내와 극락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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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암암 가는 길에서 만나는 장군폭포의 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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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암괴 위에서 만년을 살았다는 신비의 만년송.

가을은 너무 바싹하다. 나에 대해서. 가을은 나에게 고해성사를 하게 한다. 저 맑고 푸른 사파이어 빛 하늘, 색의 마술인 형형색색 단풍, 누런 들판은 내가 나에 대한 고백을 쓰게 하는 노트다. 은해사 입구 300년 된 소나무 숲, 1712년(숙종 38) 사찰 입구 일대 땅을 매입해 1714년에 소나무를 심었다. 울창한 아름드리 소나무 숲은 세월의 물결이다. 가을 햇빛이 은빛 반짝이며 숲 사이로 내린다. 이쯤 되면 숲은 몽환이며 이미 신앙에 가깝다.

소나무는 소 같은 나무다. 불그죽죽한 껍질은 소의 이미지다. 어디선가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솔잎 사이로 햇빛이 은어 비늘처럼 파닥인다. 간혹 솔방울이 떨어지면 이건 흡사 워낭소리다. 이러한 솔숲은 공적(空寂)이며 형상 없는 형상이다. 저 소나무들의 전생은 십우도의 마지막 소일 것이다. 은해사로 걷는다. 비석군이 나오고 은해교에서 잠시 멈춰선다. 다리 아래는 계류수를 담아내는 작은 소와 담이 곳곳에 있다. 마치 큰 솥 같고 밥사발 같은 것들이, 저기에 빛이 떨어지면 모두 흰쌀밥이 된다.

은해사 뒤편 주산도 부봉(富峰)이다. 주산에 기운 찬 일자문성도 있다. 사방에 노적가리 부봉이 올망졸망하다. 은해사는 부자 절이고, 불교의 고승을 배출하는 명당 중에 명당 터다. 그 후 들은 말이지만 은해사는 조선시대 전국 4대 부찰(富刹)로, 연간 10만석의 도지를 받았다고 한다. 은해사(銀海寺)의 은해(銀海)는 사람의 눈을 은해라고 말하는 데서 따온 이름이다. 부처님,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 계셔 그 분들이 발산하는 빛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날 때면, 그 풍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해서 은해사라 하기도 했다 한다. 어쨌거나 은해(銀海)는 은하수(銀河水)와 동의어다. 은빛 강, 은하수는 우주의 눈이다. 은빛 바다이기도 하고. 낮에는 햇빛과 함께, 밤에는 달빛과 함께 쏟아져 내린 은빛 물결이 은해사를 만든다. 그러므로 은해사는 은빛 밭이고 소금밭이다. 성경에 빛과 소금이 되라한 그런 장소다. 은해사는 빛과 소금을 먹고 자란 영성(靈性)이 있는 절이다. 배추를 소금에 절이듯이, 이 절은 은빛과 소금에 절인 낮은 영성이 물결치는 절이다. 영성은 은하수까지 여행한다. 낮은 영성은, 은하 중에 멀다는 안드로메다에도 간다. 더 낮은 영성은 지금도 팽창하는 우주의 무한대까지 여행할 수 있다. 그런 곳이 은해사다.

300년된 소나무 숲, 세월의 물결·신앙
불교 고승 배출하는 명당 중에 명당터
문루·대웅전·보화루 추사 김정희 현판
신이 오는, 바다 조수가 밀려오는 감동

온몸에 단풍 두른채 돌구멍 절 가는 길
기암괴석 들어찬 암괴의 천국 건들바위
바위에 가지 심은 만년송 꿈속 보는 듯

김유신이 무술 연마하며 단련한 극락굴
여인이 기도한 후 삼형제 얻은 삼인암
신비한 돌구멍 통해 들어가는 중암암



은해사로 들어간다. 문루의 은해사 현판, 불전의 대웅전(大雄殿), 종루의 보화루(寶華樓)와 노전의 일로향각(一爐香閣)은 추사 김정희 글씨다. 추사의 글씨를 보고, 은하수를 둘러싼 밤하늘 어둠을, 붓으로 찍어 쓴 글씨라는 것을 느낀다. 혹자는 추사의 글씨를 “기(氣)가 오는 듯, 신(神)이 오는 듯, 바다의 조수(潮水)가 밀려드는 듯”한 감동이라고 표현했다.

이외 전각은 대강 보고 수림장으로 간다. ‘자연과 영원으로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유독 눈에 띈다. 사람이 죽어 한줌의 재가 되면 이곳 소나무에 뿌려진다. 죽음은 이리 애틋하고 허망하다. 누구라도 한 번 가면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이 길은, 자연과 영원으로 가는 길이다.

절 입구로 나와 백흥암으로 걷는다. 가을 단풍과 바람, 새소리 물소리가 들리는 트레킹 로드, 역시 자연과 영원으로 가는 길이다. 운부암과 백흥암 가는 길이 갈리는 신일지에서 좌측으로 가면 이내 백흥암이 나온다. 비구니의 수행도량이다. 신라 경문왕 기축년에 혜철 국사가 창건할 때 백지사라 불렀다. 아마도 조주 선사가 말한 ‘뜰 앞의 잣나무’라는 뜻에서 그 이름을 취했을 것이다. 외인 출입금지지만 허가를 얻어 백흥난야(百興蘭若), 시홀방장(十笏方丈)과 서쪽 요사채 6개 기둥 주련의 추사글씨를 구경한다. 돌아나오는데 비구니 한 분이 위 요사채로 간다. 곁눈으로 봐도 미인임에 무슨 사연으로 출가를 했는지…. 그녀의 뒤태가 눈물 어린 속눈썹처럼 애잔하다. 저렇게 단풍 숲 우거진 사우로 사라져 버리면 가을의 오후가 얼마나 처연할 것인가. 그게 나만의 비밀스러운 물살일까.

느린 걸음으로 한 시간 거리인 중암암(돌구멍 절)으로 간다. 태실봉에서 오는 길과 만나는 능선 길은 향기로운 솔 내음과 단풍의 그림자를 몸에 두르고 걷는 기도의 길이다. 사바세계의 악다구니와 다툼이 없는, 어느 하오의 산길은 청아하다. 오르는 발걸음을 뗄 때마다 마음은 한걸음씩 내려간다. 드디어 기암괴석이 사방에 들어찬 암괴의 천국 건들바위에 닿는다. 어린아이가 건드려도 움직인다는 바위는 도리어 환상의 전망대라 해야 할 것이다. 팔공산의 대부분과 영천 방향이 멀리까지 조망되는 이곳은 뷰 포인트고 풍경의 변곡점이다. 탁 트인 푸른 가을하늘 아득하게 따라가면 거기에 가물거리는 어둠의 공간이 있다. 진화를 거슬러 올라가면 어둠은 언제 어디에서도 만난다. 어둠은 우주 탄생의 알파요 오메가다. 신이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다 한다면 어둠 없이 어찌 그것이 가능했겠는가. 옆의 바위 위에 만년송이 있다. 커다란 암괴 위에서 만년을 살았다는 노송은 처음 심을 때 가지를 바위에 뿌리처럼 심었다 한다. 만년송 위가 뿌리 같아 보인다. 이때 본 가을의 조망은 흡인력으로, 내가 모르는 나의 모든 것, 즉 무의식 세계를 불러내 격랑을 이룬다. 오직 꿈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는, 나도 알지 못하는 나의 것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느낀다. 이곳에는 가을의 아름다움이 모여드는 환상이 있고 영성이 있다.

잠시 쉬다가 한 사람이 겨우 빠져 나갈 수 있는 암벽 사이를 지나 조금 아래 장군수를 둘러본다. 신라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서 기도하며 무술을 연마할 때 마신 석간수다. 사람이 욕계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하면 석간수를 마셔야 된다고 한다. 다시 능선길로 올라와 아이를 못 낳은 여인이 기도하여 삼형제를 얻었다는 삼인암을 보고 지척인 중악 석굴로 내려간다. 입구에 극락굴이라 적혀 있는 이곳이 김유신 장군이 심신을 단련했다는 곳이다. 삼국통일의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이 17세(611년·진평왕 28년) 화랑일 때 백제·고구려가 신라의 강토를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해 적을 평정할 뜻을 세우고 홀로 중악(지금의 팔공산) 석굴에 들어와서 산신께 지극정성으로 기도하자 피갈선인(被褐仙人)이 나타나 신검과 비법을 전수해줘 김유신은 마침내 큰 대업을 이루었다는 그곳이다.

석굴 아래로 내려오면 아주 특이한 중암암(돌구멍절)의 일주문인 자연암벽이 보인다. 신비하다. 돌구멍을 통해 암자로 들어간다. 우람한 바위 위에 붙은 제비집처럼 암자는 공간에서 아슬아슬하다. 수행공간으로는 그지없이 좋다. 경치도 그야말로 절경이고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는 심리적인 해방의 분출, 말하자면 백척간두의 메타포다. 전설이 있는 미천과 해우소를 보고 밖으로 나온다. 중암암 뒤편은 삼인암으로 우람하고 수려한 바위군이 있다. 신묘하다 할 수밖에 없다. 여기 오면 모두 바위 속으로 간다. 정말이다. 부처님도, 김유신 장군도, 복장이 시커멓다는 우리 내면 태초의 어둠도, 백흥암 비구니의 하현달 같은 애뜻한 눈썹도 모두 바위 속에서 만난다. 그때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린다. 저 비가 지나가는 비인가. 시계바늘 반대방향으로 해서 묘봉암·기기암을 지나 은해사에서 트레킹을 마친다. 은하수가 쏟아져서 흰쌀밥이 되고 영성이 되는 은해사, 추사 김정희의 글씨, 쇠북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애잔한 뒤태의 백흥암 여승, 모두 바위 속으로 가버린 중암암의 전설, 모두가 다 그 먼 가을하늘에서 가물거리는 검을현(玄)의 연주였다.

글=김찬일 시인 대구 힐링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김석 대우여행사 이사

☞여행정보

▶트레킹 코스 : 주차장 - 은해사 - 신일지 - 백흥암 - 건들바위, 만년송 - 장군수- 삼인암 - 중악석굴(극락굴) - 중암암 - 묘봉암 - 기기암 - 주차장 ▶문의: 팔공산 은해사 (054)335 - 3318 ▶내비 주소 : 영천시 청통면 청통로 951 (치일리 479) ▶주위 볼거리 : 운부암, 거조암, 갓바위, 인각사, 불굴사, 동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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