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8] 대구의 자부심 국채보상운동<2> 언론의 대대적인 캠페인과 전국조직 구성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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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20   |  발행일 2018-11-20 제14면   |  수정 2021-06-22 17:58
국난극복 위해 펼친 최초 언론 캠페인…전 국민의 동참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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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이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된 데에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특히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해 황성신문, 제국신문, 경향신문, 만세보 등의 신문사들은 보도와 논설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대구 중구 동인동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는 당시 국채보상운동을 다룬 주요 신문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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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된 범국민운동이다. 특히 순식간에 전국에 확산된 데에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1907년 2월21일 대구군민대회가 열릴 때부터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해 황성신문·제국신문·경향신문·만세보 등은 보도와 논설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또 의연금을 직접 접수하고 국채보상운동 단체들의 취지서와 의연금 납부자 명단을 게재했다. 이 과정에서 신문사 직원들도 단연을 결심하고 의연금을 내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을 국난극복을 위해 펼친 최초의 언론캠페인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론의 적극적인 지원 가운데 국채보상운동은 날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전국적인 조직이 구성되어, 국채보상운동은 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대구의 자부심! 유네스코가 인정한 국채보상운동’ 시리즈 2편에서는 언론의 대대적인 캠페인과 전국적 조직을 구성한 당시의 이야기를 되짚어본다.


#1. 검은 활자의 붉은 힘

국채보상운동 확산을 위한 대구군민대회가 열린 바로 그날, 1907년 2월21일이었다. ‘대한매일신보’에 피 끓는 글이 실렸다. 국채보상운동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광문사(廣文社)의 김광제(金光濟)와 서상돈(徐相敦)이 작성한 취지문이었다.

‘지금은 우리들이 정신을 새로이 하고 충의를 떨칠 때입니다. 국채 1천300만원은 우리나라의 존망에 직결된 바, 이를 갚으면 나라의 보존이요, 갚지 못하면 나라의 망함이니, 이는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하나 현재의 국고 능력으로는 도저히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정녕 갚지 못한다면 그 때는 이미 3천리 강토가 내 나라 내 민족의 소유가 아니게 될 것이고, 국토란 한 번 잃으면 다시는 찾을 길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수고롭지도 않고 손해 보는 일도 없이 재물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 2천만 동포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금지하고, 각 한사람마다로부터 대금 20전씩을 매달 거둔다면 1천300만원을 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광문사 김광제·서상돈의 취지문
대한매일신보에 실려 ‘큰 반향’
황성신문 등 타언론도 속속 동참
신문사 사내 보상금 모금처 설치
기자도 담배 끊고 의연금 내기도

이때 설립된 보상소가 무려 27곳
연합회의소 만들어 한곳으로 통합
돈관리 위해 지원금총합소 만들어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관심은 대한매일신보뿐만 아니었다. 다른 신문도 연이어 지지를 보냈다. 나흘 후인 2월25일, ‘황성신문’이 서울에서 설립된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의 취지서를 게재한 데 이어, 사설 ‘단연보국채(斷煙保國債)’를 실어 국민들이 스스로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특히 ‘대한매일신보’는 연이어 국채보상운동 기사를 쏟아냈다. 2월27일에는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를, 28일에는 ‘국채보상에 대하여 동포에게 경고함’이라는 심의철(沈宜哲)의 순한글 기고문을 신문 1면에 게재해 힘을 실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회계 담당이던 심의철은 검은 활자를 통해 이렇게 외쳤다.

‘국채보상에 대해 백성들 중 일부는 “그 돈을 내가 썼나? 한 푼이라도 구경이나 해봤나? 왜 우리에게 물어내라고 하는가? 그 많은 차관은 모두 어디에 썼는가? 만일 우리들이 추렴하여 물어준다면 이에 재미 들린 이들이 또 차관을 들여올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하지만 이는 분명 잘못된 생각입니다. 정녕 나라와 토지를 빼앗기고 나면 우리가 어찌 생활할 수 있겠습니까? 대한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 가서 힘을 쓸 수 있겠습니까? 담배를 끊고 술도 끊은들 좀 어떻습니까? 비단 옷 입던 사람은 무명 옷을 입고, 밥 먹던 사람은 죽을 먹고, 타고 다니던 사람은 걸어 다니고,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빚을 갚으면 좀 어떻습니까? 그래봐야 아무런 어려움도 부끄러움도 해로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쉬운 일 하나도 못해서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한다면 그 이후의 우리 모양새는 어찌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려는 일은 죽는 것보다는 쉽습니다. 성공하면 천하만국에 빛날 것이며 국권도 곧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2천만 동포를 모두 염하여 천 개의 무덤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같은 날인 28일, ‘만세보(萬歲報)’도 주장을 이어나갔다. ‘국채상환 의금모집’이라는 논설로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자는 뜻을 밝힌 한편, 광고란에 ‘국채보상서도의성회(國債報償西道義成會) 취지서’를 싣고 의연금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또 ‘제국신문’은 28일부터 3월4일까지 닷새간에 걸쳐 ‘국채보상금 모집에 관한 사정’이라는 논설을 연일 게재해 힘을 보탰다.

대구에서 일어난 불꽃에 중앙의 신문들이 바람을 불어넣자, 전국 각지에서 호응의 불길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특히 신문사들은 사내에 국채 보상금 모금처를 설치했고,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의연금이 신문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충남 아산군에 사는 한 부인의 경우에는 ‘제국신문’에 20원을 보내면서 동봉한 편지에 이렇게 썼다.

‘제가 비록 빈곤한 가정의 주부이기는 하나 국채보상운동에 기꺼이 참여하겠습니다.’

또 김봉훈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우리 다섯 식구의 뜻을 모았다”며 다섯 식구당 1원씩 계산한 금화 5원을 대한매일신보에 보내왔다. 이러한 가운데 대한매일신보 사원들이 일제히 담배를 끊어 의연금을 내기도 했다. 특히 신문사들은 사내에 답지한 의연금과 명단을 신문에 상세하게 게재했고, 국채보상운동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널리 알렸다. 동시에 어떤 의혹도 일어나지 않도록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특히 신문뿐만 아니라 ‘대한자강회’에서 출간한 정치잡지 ‘대한자강회월보’를 비롯해 서우학회 기관지인 ‘서우’, 종합지 ‘야뢰’, 구국계몽지이자 국채보상운동 기관지인 ‘대동보’ 등의 잡지도 국채보상운동이 확산되는 데 큰 힘을 실었다. 당시 국채보상운동이 국난극복을 위한 언론캠페인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이유다.

#2. 유기적이고 조직적으로 단결하라

언론의 대대적인 캠페인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러한 가운데 전국적인 조직이 구성됐다. 가장 먼저 조직된 단체는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였다. 1907년 2월22일, 명망 있는 유지 25명의 발기로 시작된 ‘국채보상기성회’는 전국 각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던 국채보상운동을 총괄하기 위해 설립됐다. 국채보상기성회 설립은 국채보상운동의 합법성과 운동의 체계를 갖추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국채보상기성회는 설립과 동시에 곧바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취지문을 싣고 국민들의 동참을 촉구했다.

‘동포여,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를 바랍니다. 아! 국가가 망하면 국민도 망하는 바, 우리 동포여 열심을 다하며 뒷날을 기다립시다. 하여 국채를 깨끗이 청산한 연후에, 세계 제일의 향기롭고 좋은 담배 수천만 닢을 구입하여 맑은 날의 흥취를 돋우어봄이 어떠하겠습니까.’

특히 국채보상기성회는 의연금을 모으는 곳으로 보성관(普成館), 대한매일신보사, 야뢰보관(夜雷報館) 임시사무소, 상동청년학원 사무소, 유한모의 조동건재약국, 서점인 김상만의 광학서포, 고유상의 서포, 주한영의 서포 등 8개 장소를 지정하고 접수를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서울에 살고 있던 또 다른 59명이 뜻을 모아 ‘국채보상중앙의무사’를 설립했다. 국채보상중앙의무사는 ‘황성신문사’를 의연금보상소로 정하고 모금운동에 나섰다. 동시에 전국 각지에서도 지역별 국채보상회가 설립되면서 의연금을 모으는 등 분위기가 고조됐다. 이때 설립된 보상소가 무려 27곳이나 됐다.

그러던 4월1일이었다. 국채보상기성회 사무소인 보성관에 결기에 찬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국채보상전국연합운동’의 첫 임시회합을 위한 발걸음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을 보다 더 효율적으로 확산시키려면 성숙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옳습니다. 무엇보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국채보상회를 일괄 통솔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회의는 다음날에도 이어졌고,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내용이 결정됐다.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국채보상회를 통솔하는 기구의 명칭을 ‘국채보상연합회의소’로 정할 것과 조직을 책임질 임원을 선출했다. 초대 소장으로 이준, 고문에 이도재, 도총무에 장지연, 총무에 양기탁·안창호·이동휘, 부총무에 김광제, 평의장에 박은식, 부평의장에 이갑, 간사에 이종일·박용규·양한묵·서병규·이면우·김인식 등이 뽑혔다. 이준은 온 국민이 읽을 수 있게끔 국문으로 된 취지서를 작성해 4월4일에 발표하고 국민들의 참여를 호소했다.

한편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의연금 관리를 위한 통합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논의 끝에 4월8일 의연금 관리를 위한 통합기구로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가 대한매일신보사 내에 설치됐다. 소장에 윤웅렬, 부소장에 김종한, 재무감독에 박용규, 감사에 이강호·이면우, 회계에 양기탁·정지영, 평의원에 조존우, 검사원에 김광제가 임명됐고, 이들을 중심으로 의연금에 대해 철저한 수합과 관리가 이루어졌다.

‘국채보상연합회의소’와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는 국채보상이라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설립되었고 임원도 겹치는 인물이 있었지만 엄연히 다른 단체였다. 염려하는 여론이 서서히 발생하기 시작했다.

“전국적인 범국민운동이 두 단체로 나뉘어져 시행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분열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에 두 단체는 김광제와 이강호를 대표로 세워 해결책 모색에 들어갔다. 회합이 시작되었고 협의는 곧 이루어졌다. ‘국채보상연합회의소’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의 지도업무와 권장업무를 총괄하고,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에서는 의연금에 대한 수합과 관리를 전담하기로 결론을 지었다. 국채보상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는 물론 서서히 체계가 잡히고 있었다. 주춧돌이 놓이고 기둥이 서면서 국채보상운동의 온전한 모양새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國債報償運動과 言論의 역할, 정진석. 세계가 주목하는 국채보상운동, 나눔과 책임연구소.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집, 대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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