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나의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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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15 07:50  |  수정 2018-11-15 07:50  |  발행일 2018-11-15 제16면
[문화산책] 나의 11월
장윤영<오페라 코치>

나의 오래된 다이어리에서 2000년 11월에 대구오페라하우스 착공식이 있었다는 메모를 발견했다. 2003년 개관 작품 창작오페라 ‘목화’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유학을 위해 대구를 떠나 있었던 3년여를 제외하곤 2018년의 끝자락인 지금까지 직원은 아니지만 직원보다 더 오랜 시간을 대구오페라하우스와 함께했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내게는 너무나도 특별한 곳이다.

오페라를 본 적도 없는, 제주도에서 올라온 어린 대학생인 나에게 그 당시 대구시립오페라단 감독이었던 김완준 선생님은 오페라 악보를 주며 연습을 해보라 하셨다. 며칠 후 오페라단 연습실에서 바로 연습반주를 해보게 했고, 그렇게 나의 오페라 인생이 시작됐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냥 열심히 연습을 했던 것 같다. 다음 작품 기약이 없는 음악가들은 그저 지금을 가장 잘 해내야 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편 두 편 계속 기회가 주어졌고 김완준 감독님이 대구오페라하우스 초대 관장으로 부임한 후엔 대구시립오페라단과 대구오페라하우스를 오가며 오페라 반주를 했다. 반주자에서 지금의 오페라 코치가 되기까지 나를 향한 선생님의 믿음이 가장 큰 힘이었다. 그렇게 대구오페라하우스의 역대 예술감독들을 다 거치며 지금의 나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오페라 반주자는 연습실의 붙박이장 같은 것이다. 원래 연습실에 있던 것처럼 드러나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성악가나 스태프에게 거슬리지 않도록 지휘자의 요구에 따라 오케스트라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나는 표시나지 않게 기약 없는 미래에도 그곳에 있기 위해 젊은 시절을 열심히 지내왔다. 물론 코칭를 해야 하는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때의 미래가 지금이라면 나의 과거는 성공한 미래를 이뤄냈지만, 꿈이 현실이 된 지금도 나는 기약 없는 미래에, 또 이곳에 있기 위해 여전히 최선을 다하며 매 순간 임하고 있다. 여전히 불안하지만 너무도 행복하게 말이다.

나의 고향 제주의 11월은 너무도 아름답다. 돌담 안의 과수원마다 주렁주렁 달린 오렌지색 감귤, 곱게 솟아 있는 오름의 억새물결, 한라산의 흐드러진 단풍. 기억 저편에 선명히 남아 있는 제주의 가을을 20년 가까이 가보지 못한 것 같다. 그립지만 그 가을을 대구에서 계속 보내고 있음이 너무나 행복하다. 갈 수 없음이 아직은 너무 감사하다. 그저 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 이 세상에 소위 말하는 학연, 지연, 빽이 없어도 성공할 수 있는 곳이 무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를 온전히 다 보여준다는 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얼마나 정의로운 것인가. 그 무대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실력이라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가. 마치 올림픽처럼 말이다.
장윤영<오페라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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