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술 권하는 사회, 술독에 빠진 한국인

  • 배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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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12   |  발행일 2018-11-12 제31면   |  수정 2018-11-12
[월요칼럼] 술 권하는 사회, 술독에 빠진 한국인

시인 조지훈은 1956년 3월 신태양지에 실린 수필 ‘주도유단(酒道有段)’에서 음주에도 주도(酒道)가 있다며 술에 대한 태도나 술 마시는 품격을 바둑에 비유해 9급부터 9단까지 18단계로 나누었다. 맨 아래 단계인 9급 부주(不酒)는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 마시는 사람이고, 가장 높은 단계인 9단 폐주(廢酒) 또는 열반주(涅槃酒)는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이다. 폐주는 아마 ‘술을 석잔 마시면 도(道)가 통하고 한 말을 마시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고 노래한 당나라 시인 이태백의 경지가 아닐까 싶다. 고상하거나 품위 있는 분류는 아니지만 술꾼들에게는 훨씬 와닿는 세간의 음주 등급도 있다. 맨 아래가 주광(酒狂) 즉 주정뱅이요, 그 위가 1주일에 한 번 마시는 주객(酒客)이다. 그 다음이 1주일에 3회 이상 마시는 주당(酒黨), 그 위가 안주·주류·상대를 가리지 않는 3대 불문의 주선(酒仙)이다. 최상급은 안주·주류·상대에 시간·장소까지 가리지 않는 5대 불문 주성(酒聖)이다.

옛 기록을 보면 우리민족은 유난히 음주와 가무를 즐긴 듯하다. 후한서에는 ‘동이족은 모두 토착민으로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 한다’고 전한다. 1920년에 발간된 ‘세계 알코올 대사전’에도 한국인의 음주 태도를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음주행위에 대해 매우 관대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술 역시 과유불급이다.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음주 폐해가 국가적 해결과제로 대두되면서 수시로 금주령이 내려졌다. 특히 영조 때는 강력한 금주정책을 펼쳐 국가의 제사인 종묘제례에도 술을 쓰지 않고 차나 감주를 사용했다. 이웃을 연좌시키는 법을 만들어 한 집에서 금주령을 범하면 세 집이 같은 처벌을 받았다. 심지어 남병사(南兵使) 윤구연은 금주령을 어긴 죄로 숭례문 앞에서 참수형을 당하기도 했다.

세종대왕은 술의 해악을 지적한 대국민 호소문 ‘계주교서(戒酒敎書)’까지 내렸다. 내용의 일부를 보면 이렇다. “술의 해독은 매우 크다. 어찌 곡식을 썩히고 재물을 허비하는 일뿐이겠는가. 술은 안으로 마음과 의지를 손상시키고 겉으로는 사람의 위엄과 품위를 잃게 한다. 혹은 술 때문에 부모를 봉양하는 일마저 저버리게 되고, 혹은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한다. 그 해독이 크면 나라를 잃고 집안을 망치게 만들며, 그 해독이 작으면 성품을 거칠게 하고 생명을 잃게 만든다.”

술은 적당히 마시면 보약이요 ‘망우물(忘憂物)’이지만 과하면 독약이요 패가망신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술을 1급 발암물질로 지정할 정도로 그 폐해가 흡연이나 비만보다 심각하다. WHO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2015~2017년 연평균 1인당 알코올 섭취량은 10.2ℓ로 아시아권에서 라오스 다음이다. 남성만 놓고 보면 무려 16.7ℓ다. 알코올 16.7ℓ는 360㎖ 소주(17도) 273병, 500㎖ 맥주(5도) 668캔을 마셔야 섭취할 수 있는 양이다. WHO는 2016년 우리나라 남성 사망자 100명 중 12명이 직·간접적으로 술 때문에 사망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사례에서 보듯이 음주 폐해는 국가의 의지와 사회적 관심에 따라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술에 관대한 우리나라는 보다 강력한 음주 규제 정책을 펼쳐야 한다. 정부 차원의 알코올 중독 예방교육과 더불어 주류업체들이 분담하는 알코올중독예방치유분담금제 도입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학교·공원 등 공공장소에서만이라도 과도한 음주행위를 제한하는 법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심신미약을 이유로 음주 범법자들의 형량을 줄여주는 주취감경도 폐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올해도 벌써 12월이 코앞이다. 이어지는 송년 술자리 모임으로 주당들에게는 살맛나는 달이기도 하다. 하지만 술과 매·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술이 사람을 마시는 일만은 없도록 음주에도 절제의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 ‘아침술은 돌(石), 낮술은 구리(銅), 밤술은 은(銀), 사흘에 한번 마시는 술은 금(金)’이라는 탈무드의 지혜가 도움이 될 듯하다. 프랑스 격언에도 ‘악마가 사람들을 찾아다니기에 너무 바쁠 때는 술을 대리인으로 보낸다’고 했다. 자신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생각한다면 올 연말에는 술 좀 작작 마시자.

배재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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