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인터뷰] ‘지역 사회공헌 독보적 역할’ 여준규 여성메디파크 병원장

  • 홍석천,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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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10  |  수정 2018-11-10 08:32  |  발행일 2018-11-10 제22면
“의사들이 자기밖에 모르는 집단이라는 인식 안에 갇히는 게 싫었다”
[Y인터뷰] ‘지역 사회공헌 독보적 역할’ 여준규 여성메디파크 병원장
긴 머리와 편안한 웃음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사회공헌활동 분야에서 독보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여준규 여성메디파크병원장. 손동욱 기자 dingdong@yeongnam.com

‘세상에는 세 부류의 의사가 있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소의(小醫), 사람을 고치는 중의(中醫), 마지막으로 사회를 고치는 대의(大醫)다’ - 동의보감 중

메디시티를 지향하는 대구는 의료인 수, 종합병원, 응급센터 등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전국 최고 수준이다. 각각의 진료 분야에서 전국적 명성을 얻고 있는 명의도 수없이 많다. 하지만 사회공헌이나 사회봉사를 논할 때 선뜻 떠오르는 의사는 많지 않다.

여준규 여성메디파크병원장은 대한장애인배드민턴협회 회장, 대한장애인체육회 부회장, 소피아 농아인올림픽대회 한국대표단 단장, 대구사격연맹 회장 등을 역임했거나 재임 중이다. 또 달서구 최대 여성축제인 ‘성서여성문화축제’에 13년간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자를 양산하는 사회 구조를 개선하는 것도 의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사회공헌 분야에서 독보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지역 의료계의 돈키호테, 여준규 원장을 만나봤다.

▶대형병원을 경영하면서 다양한 사회활동까지 정신없이 바쁠 것 같다. 이미 의사로서 명성을 쌓을 만큼 쌓았는데 왜 이런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가.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어머니가 봉사하는 아들, 남을 돕는 의사가 되길 바라셨다. 어머니는 남들이 쉽게 하기 어려운 것이라도 의사라면 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1985년 YMCA에는 수화교육과정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직접 교육비를 내고 수업을 듣게 했다. 20대인 나로서는 ‘뭘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뜻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수업을 들으면서 당시 청각장애인의 현실을 보고 깜짝 놀랐다. 3개월 과정의 수업을 들으면서 수화를 배울 뿐만 아니라 농아의 현실을 보게 됐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수의 청각장애인들이 세상의 그늘에서 동냥이나 구걸·날품팔이에 의존해 어렵게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날 돌아보게 됐다. 부자는 아니지만 잘 먹고 잘 살고 의과대학에 다니고 있는 나는 행복한 놈이구나 싶었다. 이후 ‘해바라기’라는 서클을 만들었다. 당시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때는 정상인이 왜 농아인을 위한 봉사동아리 활동을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회원들이 커피나 빵을 팔아 수익금으로 청각장애인학교에 책과 장학금을 주곤 했다. 이게 봉사라고 불리는 사회활동 분야에 관심을 두게 된 첫 번째 계기다.”

▶첫 번째라…, 그럼 두 번째 이유도 있다는 것인데.

“내가 20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그늘이라고 해야 하나. 그 후 빈자리를 많이 느꼈다. 황량한 벌판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랄까. 그때부터 힘 없고 ‘빽’ 없는 사람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당시는 생각뿐이었지만(웃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본격적으로 행동에 옮긴 건 개업 때쯤이다. 월급생활을 끝내고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때가 2003년이다. 주위에서 말이 많았다. ‘병원이 어렵다던데 왜 그러나’ ‘정치하려고 하나’라는 얘기를 직접 하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국민이 갖고 있는 의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다. 버스기사나 택시기사가 폭행당하는 일이 생기면 국민은 청와대에 청원을 넣는다. 그러나 응급실에서 의사가 환자나 보호자에게 맞는 일이 생기면 의료계만 문제제기를 할 뿐 일반인에게 감정적으로 동의를 받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의사가 맞으면 ‘맞을 만했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식 같은 의사가, 우리 가족 같은 의사가 맞으면 안 된다’라는 공감대를 얻었으면 좋겠다. 예전부터 내가 얘기했던 것이 의사들의 사회 기부 정례화다. 의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대한의사회 등을 통해 매년 어려운 이웃을 돕거나 사회공헌 활동을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10년만 하면 의사를 보는 국민의 시선과 정서가 바뀌지 않겠느냐는 의미였다. 나는 의사들이 자기밖에 모르는 집단, 이기주의자,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사는 집단이라는 인식에 반감을 가졌다. 나는 그런 인식 안에 갇히는 게 싫었다. 그래서 개업하자마자 조손가정, 결손가정, 청각장애인, 탈북자, 결혼이주민을 돕는 데 나서게 된 것이다. 성서여성문화축제도 그런 일환이다.”

▶2003년부터라면 벌써 15년이 넘었다. 이제는 처음의 삐딱했던 시선도 많이 줄었겠다.

“내가 도움이 된 분야, 특히 장애인체육 분야에서는 이제까지의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오지랖 넓네’ ‘돈 좀 벌었다고 돈질하네’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 있다. 당신도 오지랖 넓고, 돈질하라고.”(웃음)


1985년 어머니 권유에 따라
YMCA 수화교육과정 들어
청각장애인 보며 현실 자각

개업 하고 경제적여유 생겨
연간 수천만원 이상 기부해

장애인체육단체 수장 활동
형편되면 실업팀 만들고파



▶15년간 해왔다니 적잖은 금액을 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쓰는 비용을 줄였다. 제일 먼저 유흥업소 출입을 끊었다. 골프는 배우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비싼 명품도 없다. 이렇게 하면 기본적으로 수천만원을 모을 수 있다. 대구사격연맹에 있을 때는 연간 5천만원 이상 도왔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사회활동을 하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체육회 활동 역시 돈으로만 장애인을 돕고 있는 게 아니다. 장애인체육단체 수장이 됐을 때 내가 분명히 한 말이 있다. ‘회장으로서 분명히 협회에 기여를 하겠다. 하지만 단순히 돈만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자존을 높이고 스스로 독립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장애인선수들은 메달이 연금과 직결된다. 연금을 받아야만 선수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보다 많은 선수가 보다 많은 대회에 나가 보다 많은 메달을 따야 한다. 선수층이 두꺼워지고 연금을 받는 선수가 많아지면 ‘국가대표’라는 자긍심과 생활도 가능해질 것이다. 그래서 장애인체육회장이 이런 구상을 좀 더 현실성 있게 추진할 수 있으면 어떨까 고민 중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어느 정도 형편이 되면 장애인실업팀을 만들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여성메디파크병원은 메디시티 1세대다. 메디시티 활동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초창기 카자흐스탄에서 요청이 왔다. 의사 트레이닝을 시켜달라고. 당시 3개월 정도 했다. 이들이 돌아가서 카자흐스탄 정부에 나를 추천했다. 카자흐스탄 정부의 초대를 받고 갔다.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선진의료인이라는 자부심에 순진하게 현지에서의 수술비도 거절했다(웃음). 현지에 가보니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 중에는 700㎞를 달려 오거나 심지어 3박4일 거리를 이동해 온 사람도 있었다. 현지 정부는 이들 중 선별해 수술하라고 했지만 어떻게 그런 사람을 그냥 돌려보낼 수 있나. 그래서 모두 수술하겠다고 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미친 듯이 수술했다. 그런데 카자흐스탄 병원은 오후 2시에 문을 닫는다고 하더라(웃음). 그래서 현지 의사들에게 한국 의사들의 경쟁력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한국 의사들이 손기술이 있는 것은 경쟁이 치열해서다. 또 부지런하다. 오전 8시부터 밤 9시까지 수술한다. 오후 2시에 문을 닫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했다. 이렇게 카자흐스탄에 3년 연속 초청받아 대구시와 지역 의료계, 그리고 카자흐스탄 당국을 잇는 고리 역할을 한 게 기억에 남는다.”

▶중국 진출도 추진하고 있다고 들었다.

“7년 전부터 준비 중이다. 두 곳과 논의 중이다. 중국 전역에 여성종합병원 네트워크를 추진하고 있는 모 그룹과 제휴를 추진 중이다. 자본과 시설은 중국 측에서, 의료는 우리가 맡는 형식이다. 중국 측 환경이 유동적이라 아직 논의 중이지만 차근차근 절차를 밟고 있다. 이것이 여성메디파크의 해외진출 결정판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부분이다.”

▶‘정치는 사회를 고치는 의사’라고 한다. 고리타분한 질문일 수 있겠지만 묻고 가겠다. 정치할 생각은 없는가.

“예전에 어느 자리에서 내 꿈은 보건복지부 차관이라고 말한 적 있다. 장관이 아니라 차관. 왜냐하면 장관은 정치인이지만 차관은 전문직이 맡아 꾸준히 보건정책을 펼칠 수 있는 자리라고 봤기 때문이다(웃음). 지금은 장애인들이 자기 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고 싶다. 장애인 체육활동을 총괄하는 자리도 개인적으로 탐나는 자리다. 그리고 지역에서도 일정 부분 역할을 하고 싶다. 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동생을 돌보는 소년가장으로 오로지 내 힘으로 부족하지만 일가를 이룬 경험이 있다. 이런 경험을 대구를 위해, 대구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쓰고 싶은 마음이 있다. 물론 지금까지는 꿈만 꾸고 있다(웃음). 정치는 자연스러워야 한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진출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지 억지로 끼워 맞추면 탈이 날 수밖에 없다. ‘병원장인 의사가 정치를 한다고? 돈 좀 벌었다고 또 나오네’라는 말보다 ‘그 사람은 이제 나와야지’라고 평가받는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 정치를 하려고 했다면 10년 전에 했다. 정치에 목적을 두고 해오진 않았지만 정치를 안 하더라도 대한장애인체육회에 대한 지원은 계속할 것이다. 지금은 중국 사업에 치중하고 있다. 참, 메디시티의 틀은 바꾸고 싶다. 의료관광객 유치도 중요하지만 진짜 산업의 틀에서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메디시티’를 만들 수 있는 자리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홍석천기자 hongsc@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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