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불의(不義)’와 투쟁 후 ‘불(火)’앞에서 산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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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09   |  발행일 2018-11-09 제33면   |  수정 2018-11-09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신창일
20181109
일을 마치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면 신창일은 군부독재에 항거했던 시절 탐독하던 이념서적이 꽂혀 있는 서가 앞에 물끄러미 앉아 있곤 한다.

내 젊음은 ‘불의(不義)’와의 싸움으로 점철됐다. 나랏님이 군부독재의 상징이었기에 우린 출세보다 운동권에 최면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다들 투사였고 정신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하지만 독재가 사라지자 운동권도 하나둘 자기만의 길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어떤 자는 대통령이 됐고 어떤 자는 세상과 담을 쌓고 자연인이 되기도 했다.

한때는 이념이 독재와 전쟁했지만 이념은 곧 자본과 진검승부를 벌여야만 했다. 난 이념과 생계, 그리고 가족 사이에서 참 많이도 방황했었다. 맘만 먹으면 국회의원도 될 수 있었고 교수도 될 수 있었고 시민운동가로 굵직한 족적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난 그 모든 가능성을 뒤로했다. 중년이 시작될 무렵 나는 불(火) 앞에 섰다. 조리사가 된 것이다.


젊은 시절 출세보다 운동권에 최면…군부독재 맞서 항거
그 이념보다 더 무섭게 다가온 뇌병변으로 태어난 외동딸
장애인 인권 옹호 투사가 된 아내, 가족 지키는 숭고한 힘
불덩이 같은 웍 놀리며 생계와 전쟁…중식당 오너셰프 삶


그건 ‘가족’ 때문이다. 가족은 이념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되는 일종의 ‘지상명령’. 정말 아름다운 구속이었다. 젊은 날에는 먹고산다는 것의 그 숭고한 힘을 절감할 수 없었다. 아니 보려해도 볼 수 없었고 보이지도 않았다. 보고 싶은 것만 봐야했기 때문이다. 그땐 군부독재 타도보다 더 큰 가치는 없는 줄 알았다. 독재만 타도하면 이내 유토피아가 도래하는 줄 착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먹고산다는 건 독재보다 더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생계는 사람을 치사하게도 만들지만 어떤 때는 숭고하게도 만든다. 생계도 독재처럼 한 사람을 투사로 만든다. 소시민의 일상도 투사급이다.

감옥에서도 꿋꿋했던 나였다. 하지만 난 1986년 초봄에 봄꽃보다 더 세게 통곡한다. 외동딸(신나리)이 뇌병변 중증장애자로 태어난 것이다. 나는 독재투쟁보다 더 가열찬 몸짓으로 딸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가급적 정치와 거리를 뒀다. 그건 내 모든 걸 포기하는 것이었다. 내겐 장애가 독재보다 더 무서워 보였다. 그런 내 외동딸이 3년 전 결혼을 했다. 난 그게 기적같았다. 지금은 서울에서 잘살고 있다. 딸 때문에 오래 절망한 아내(전정순)도 덩달아 장애인 인권을 옹호하는 투사가 된다. 한때 성서공동체 FM에 고정출연해서 ‘담장을 허무는 사람들’이란 프로를 진행했고 그 내용을 책으로 묶어내기도 했다.

지금 나는 대구 달서구 상인동 롯데시네마 뒤편 먹자골목에서 ‘깐탕(깐풍기와 탕수육)’이라는 중식당을 운영하는 오너셰프. 종일 고압가스 앞에서 중식용 프라이팬인 웍을 움직인다. 기름 때문에 팔뚝 곳곳이 화상투성이다.

여긴 다른 식당이 문을 닫을 때쯤 손님이 가장 북적대는 심야식당 스타일이다. 식당 한편에는 내 나태함을 일깨워줄 이런저런 인문학 관련 책이 꽂혀 있다. 일을 마치면 이슥한 새벽이다. 생계에 찌들어도 내 의식의 창 한쪽은 늘 파릇하게 열려 있다. 간혹 나와 함께 시위를 했던 도반들이 올 때면 난 투쟁의 돌멩이를 거머쥐던 대학시절 내 손을 바라본다.

내 오른손 중지 끝마디는 뭉개져 있다. 제3산단 선반공의 삶을 살았을 때 입은 산업재해 흔적이다.

1960년생 신창일. 환갑을 눈앞에 뒀다. 갑자(甲子)를 한 번 돌아온 적잖은 나이다. 갑자기 선가(禪家) 용어인 ‘회광반조(回光返照)’가 생각난다. ‘빛을 돌이켜 스스로에게 비춘다’는 의미. 한 생명이 죽음에 달하면 갑자기 최후의 발악과 같은 엄청난 괴력이 발생된다. 마치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한 번 파르르 밝은 광채를 내뿜는 것과 같은 현상인데 이제 그 말뜻을 조금 알 듯하다. 끝이라 할 때 ‘초심(初心)’을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나는 종일 주방에서 산다. 불덩이 같은 웍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때 난 가장 단순해진다. 일종의 ‘평정심’이다. 내가 만든 이 음식이 어떤 손님의 뱃속으로 들어가 생명의 원천이 된다는 것. 그걸 생각할 때마다 ‘아, 음식 만드는 것도 하나의 운동이구나’라는 걸 깨닫게 된다.

삶의 온갖 신산스럽고 처절한 고난을 다 겪은 것 같다. 나는 지금 권력의 정점이 아니라 권력의 가장 낮은 단계에 도달해 있다. 내려온 것도 아니고 올라온 것도 아니다. 그냥 내 자리를 ‘성취(成就)’한 것. ‘성공’한 것이 아니다. 성공은 ‘자본의 그늘’ 아닌가. 성공은 후유증을 남긴다. 그래서 난 성공이란 말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성공은 또 다른 절망의 실패를 잉태하기 때문이다. 다들 성공에 너무 중독돼 있다. 그런 시각에 찌든 이에겐 내 삶이 시시해 보일 것이다. 그런 시선을 가진 자를 만날 때마다 나는 고물수집상인 아버지를 따라 대구로 오던, 구겨진 종이 같았던 내 청년기가 떠오른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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