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뜨거울 때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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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09 07:50  |  수정 2018-11-09 07:50  |  발행일 2018-11-09 제16면
[문화산책] 뜨거울 때 꽃이 핀다

겨울의 시작이자 계절의 끄트머리인 11월이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공기를 대면할 때면 작년 이맘때쯤 한남오거리 버스정류장에서 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다 쓰고 난 연탄이 생각난다. 그날도 어김없이 대학로를 가기 위해 140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를 간발의 차로 놓치고 다음버스까지 8분여 남아 있어 적잖이 짜증이 나있는 상황이었다. 한숨을 쉬며 무심코 정류장 뒤쪽을 봤는데 다 쓴 연탄이 버려져 있는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온전하게 쓰인 연탄을 본 터라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가서 봤더니 보랏빛을 내는 예쁜 꽃이 연탄구멍에 꽂혀 있었다. 마치 그냥 지나치지 말고 ‘나 좀, 나 좀 봐주세요’하고 작은 소리로 수줍게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더 가까이 가서 보니 종이상자를 대충 오려서 매직으로 무심하게 써놓은 글도 함께 있었다. 뜨거울 때 꽃이 핀다. 그 문구를 본 순간 방금 내가 느낀 작은 짜증과 조금 지쳐 있던 마음 한편의 염증이 수증기가 되어 증발하는 듯한 묘한 쾌감을 느꼈다. 다 쓰고 나서 식어버린 연탄 위에 핀 작은 꽃, 모든 것을 온전히 뜨겁게 태우고 난 후에야 피어나는 꽃이라….

그 정류장은 워낙 예술가들이 많이 활동하는 곳이라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으리라. 그리고 식을 대로 식어버린 내 마음에 다시 살아난 어떤 작은 불씨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연을 만들고 무대에 서면서 ‘자기관리의 신’이라 불리는 배우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 꽤나 자신감 넘치고 운동을 열심히 해서 훌륭한 외모도 가졌다. 늘 불특정 다수 앞에 나서는 직업이니 가꾸고 관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은 울지 않는다. 아니 우는 것을 모른다. 서로 다른 마음끼리 거칠게 달려 오다 부딪쳐 넘어져 피를 흘리거나 뜨거운 포옹을 한다든가 격렬하게 침을 튀기면서 자신의 처지를 변론하지 않는다. 공연 끝나고 헛헛한 속을 데우려고 마시는 소주 한 잔을 마시지 않는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배우는, 남의 삶을 대신 살아가야 하는 배우라면 냉정과 열정 사이 그 중간이 아니라 열정 쪽에 더 가까이 서 있었으면 좋겠다. 뜨거워야 꽃이 핀다… 뜨거워야 비로소 냉정함을 연기할 수 있다. 뜨거워야 식을 줄도 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시인의 시가 생각나는 계절이다. 우리 조금은 뜨거워져도 괜찮지 않을까?

박아정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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